『장자』(김갑수)를 읽고
"장자는 허무주의자입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니체, 카뮈, 사르트르 등 많은 철학자들이 허무를 논하면서도 자신들의 철학이 허무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과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철학이 허무를 바라보지 않는 이들에게도 허무를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는 개인을 죽음 앞에 내몰면서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태도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허무를 말하면서 더 깊이 허무를 파고들어야 한다며 이를 직시하라 했고, 그 직시가 있었기에 그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장자 역시 허무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허무를 논하면서도 동시에 행복을 이야기했다. 장자가 『장자』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개인의 행복'이었다. 그는 더 많은 개인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장자』는 장자의 제자들과 후대 사람들이 엮은 책으로, 수많은 흥미로운 우화(이야기 또는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가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이 함께 등장하며, 이를 통해 삶에서 잊지 말아야 할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장자가 말하는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그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상태를 행복으로 보았다. 현실을 회피하지도 않았다. 그는 허무를 인정하면서도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낙천적 허무주의자의 길'이다. 장자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믿었다.
chill.. 어려워요
chill 가이란? 느긋하고, 여유로운, 쿨한 남자.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안한 태도를 유지하며 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완전 장자잖아요.
장자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규칙과 도덕을 강요하면서 자연스러움을 잃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좋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존재와 세상이 '도(道)'라는 하나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태도라고 여겼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단순한 자연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장자가 말하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만든 법, 제도, 도덕, 가치관 등이 인간을 속박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위를 버리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따르라 했다. 장자는 『장자』를 통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삶과 세계관을 설파했다. 그가 말한 '무위(無爲)'는 억지로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삶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본 것이다.
인위도 자연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면, 그 인위 또한 자연에서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문명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장자가 말하는 '자연스럽게 사는 삶'은 쉬운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당장 내가 돈, 명예,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걸 고민 없이 내려놓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사회 안에서는 최소한의 규칙과 제도가 필요하다. 장자는 단순히 문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문명과 제도가 자연의 흐름을 방해할 때, 즉 자연을 거스를 때를 비판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는 '반문명주의자' 보다는 '문명회의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장자의 철학은 인간의 한계를 지나치게 절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장자가 살던 시대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인간의 한계는 분명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절대적 시각이 인간의 한계를 더 축소시킬 수 있다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연과 인위적인 것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장자의 사상은 또 한 번의 한계 앞에 선다. 유가 철학자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맹자는 "인간은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고, 순자는 오히려 자연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한비자는 "세상은 장자가 말하는 것처럼 조화롭고 부드러운 곳이 아니라, 경쟁과 갈등이 존재하는 곳이므로 법과 규율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장자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고 했지만, 이후 많은 사상가들이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장자의 철학은 사회 개혁이 필요한 난세에서도 큰 영향력을 얻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장자의 자연과 인위를 나누는 이분법적 시각은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면, 인간이 만든 문명도 자연의 일부일 수 있다. 현대 철학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일 수 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문명을 만들었고, 문명이 다시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인간이 만든 지식과 지혜를 경계했다. 그는 이것들이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도 인류는 여전히 많은 불행 앞에 서 있다. 장자의 철학을 완전히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법, 불필요한 걱정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등을 배울 수 있다.
장자는 궁극적으로 개인이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되묻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그의 사상을 모두 실천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던진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곱씹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