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자연'을 '하늘(天)'이라고 불렀다. 이는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과 비슷해 보인다. 장자가 말하는 하늘은 기독교적 하나님처럼 신성하거나 인격적 존재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인류 문명을 버리면서까지 따라야 할 진리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장자는 '하늘'이라는 이름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닐까. 장자의 글을 읽다가 문득 든 상상이었다.
성경에서도 여러 차례 하나님이 '하늘'에 있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하나님이 하늘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하듯이 하늘이 신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칭하는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하늘에 있다기보다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장자의 하늘과 기독교의 하늘은 더욱 비슷한 구석이 많다.
장자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 중국에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전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없던 시대에 장자가 자연을 ‘하늘(天)’이라고 부른 점은 흥미롭다. 장자는 하늘에 인격적 존재가 있다고 보진 않았지만, 자연의 이치와 운명을 하늘이라 불렀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의미가 조금씩 다른 '변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도가 철학과 기독교는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된다. 미세한 변주를 통해 사상과 철학이 전혀 다른 형질을 띠게 되는 과정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장자가 말하는 '우연'과 '운명'이다. 장자는 운명의 존재를 믿었다. 그에게 운명은 자연의 일부였으며, 인간이 그것을 바꾸려 애쓸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장자는 "우연은 없고 모든 것이 필연이다"라며,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결국 주어진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본다. 큰 틀에서 보면 ‘거부해서는 안 된다’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도가 사상과 기독교는 유사한 지점을 가진다. 다만, 기독교는 도가 사상보다 ‘섭리 속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계획하고, 모든 길을 예비했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언 19:21)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의지'를 통해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장자가 하늘을 보다 인격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운명’ 개념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위적인 것'에 대한 개념도 달라졌을 수도 있다.
장자는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해도, 그 선택조차도 결국 자연의 흐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진정한 자유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장자는 '인간 스스로 뜻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결국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억지로 무언가를 바꾸려 하거나 인위적으로 애쓰는 것은 도(道)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장자》에서 한비자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아갈 수 없고, 인간은 도(道)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거야’라고 해도, 결국 하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가 말하는 자유 의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자유'보다는 '자연의 흐름을 순응할 자유'에 가깝고, 기독교의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택할 자유'에 가까운 것인데, 겉보기에도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장자가 기독교적 자유 의지를 알았다면, 어떻게 해석했을지 궁금해진다. 장자는 그 자유 의지를 하나의 ‘인위적인 개념’으로 보고 거부했을까, 아니면 도(道)와 연결해 새로운 해석을 했을까. 결국, 이 둘의 자유 의지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로 미세하게 구분된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간이라면 해석의 기로에 놓여있을 수 밖에 없다.
이 글을 쓰게 된 발단으로 올라가서 다시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다.
장자는 천국에 갔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를 주었다고 믿는다. 이를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일반 계시는 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신적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자가 자연 속의 도(道)를 탐구하는 과정은 어쩌면 하나님을 찾는 과정이었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이 공정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그들의 삶과 양심을 기준으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보는 개념이다. 장자가 인간이 하나로 모아지는 길이라는 도(道)를 따랐다면, 하나님이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실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죽음 이후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죽음 이후 '영들에게 전도하셨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근거로, 죽은 후에도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 개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기도 한다.
장자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가치들을 거부했다.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도덕적 기준을 주고, 신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상충되는 지점이다. 장자는 이를 또 하나의 인위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전통적 기독교 견해에서는 예수를 알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본다. 장자가 살던 시절에는 복음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장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셈이다.
장자의 사상과 기독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두 사상 모두 스스로를 얽매는 규범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장자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자유를 찾았고,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장자가 하나님을 만났을지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자연 속에서 찾으려 했던 도(道)가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섭리와 연결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에서, 결국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태도'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장자는 오늘날 내 삶 속 멘토들 중 세기를 뛰어넘는 또 한 명의 멋진 멘토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장자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하던 내 삶에, 오늘은 유독 많은 질문들을 장자에게 던졌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