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양자역학》(빅 맨스필드)을 읽고
과학과 종교는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믿었다. 과학은 끊임없이 실험과 논리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했고, 종교는 인간의 삶과 존재 의미를 통해 인류를 설명하려 했다.
《불교와 양자역학》의 저자 빅 맨스필드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질문을 동시에 던지며, 불교와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 사이의 놀라운 연관성을 탐구했다.
불교는 약 2,500년 전 북인도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고, 각 지역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지만, 그 중심에는 ‘공(空)’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현대인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공은 세상 모든 것이 독립적이지 않은 서로 의존하며 변화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 세계에서는 입자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고, 관찰하기 전까지는 여러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 더 나아가 입자들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불교의 공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런 유사성을 바탕으로, 불교와 과학이 단순한 비교를 넘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과학과 불교는 지식을 탐구하는 방식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과학에서는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가 주장한 이론이라도 그 권위와 상관없이 실험 결과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면 폐기된다. 과학에 실험이 있다면, 불교에는 경험이 있다. 티베트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불경 보다 경험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 수행자들은 깊은 명상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과 불교는 유사성을 가진다.
차이점도 있다. 과학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불교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 즉 개인적인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개인적 경험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렵다. 이런 차이 때문에 과학이 불교의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저자는 과학과 불교는 서로 다르지만 다른 그 자체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양자역학과 자비를 연결하는 지점이었다. 저자 또한 그 연결에 놀라워했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저자는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우리 역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아도 실체가 없다고 보는 불교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의 성격과 감정, 사고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개념 또한 양자역학의 ‘무차별성’ 원리와 유사하다. 입자들은 개별적인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 서로 바꿀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진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비(慈悲)에서 ‘자(慈)’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자비는 모든 존재를 연민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이며, 자비는 특정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자비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자비가 얼마나 깊고, 넓게 펼쳐질 수 있는가이다.
저자는 과학과 불교의 대화를 통해 지식과 사랑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리학이 설명하는 우주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본질을 공이라고 보고, 깨달음을 통해 자비로운 삶을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과학과 불교는 도출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인간이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최근 읽었던 《만들어진 신》이 생각났다. ‘신이 없어도 가능한 인간’을 입증하려는 과학적 시도를 통하여 종교를 맹렬히 비판했던 도킨스와는 달리, 이 책의 저자는 종교를 존중하는 자세로 종교와 과학을 융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세상과 인간을 탐구하는 저자의 통찰력이 빛났던 책이었다. 또 그러나 이 두 책을 통해 비판적 자세나 수용적 자세나 결론은 하나로 연결된다.
20세기 물리학의 거장 존 아치볼드 휠러는 “과거를 모든 점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과거는 현재에 기록된 것들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기록 장비로 현재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를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고 했다.
이 말을 곱씹으며, 나는 지난 주말의 일을 떠올렸다. 엄마는 집안 정리를 하다 발견했다며 내게 박스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시절까지 내가 책을 읽고 썼던 글, 공부하며 남긴 노트와 다이어리, 그리고 받았던 편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기억도 안 나는데 내가 썼다고 하는 글들과 기억도 안 나는 친구라고 불렸던 타인의 이름들 그리고 그들이 내게 썼다는 글들. 친구도 나도 모두 타인이 되어있었다.
나는 한 장 한 장을 펼쳐 보며, 과거가 단순히 고정된 것이 아님을, 오히려 현재 속에서 새롭게 읽히고 재해석될 수 있음을, 이를테면 휠러의 말처럼 과거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 내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게 살아 있는 존재임을 보란 듯이, 내 삶의 과거, 현재, 미래에 국한하지 않고, 끊임이 없이 경험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타인들과 연결되고, 완전히 남처럼 변한 나와도 연결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계속해서 유동성을 가진다. 불교가 말하는 연기의 원리처럼, 우리는 서로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이 책을 통해 깨달은 불교와 양자역학의 연관성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처럼,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말이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식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지혜와 자비의 합일’처럼, 우리가 더 깊이 이해할수록 더 넓은 연민을 가질 수 있다. 과학과 불교, 양자역학과 중관사상이 만나듯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그렇게 만났었고, 만나고, 만날 것이다. 아니, 그것들에는 시점을 붙일 수 없다.
이 책은 종교와 과학의 비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감히 이름 붙이기 어려운 깊은 통찰을 준다. 지식, 그것에 이름을 붙여본다면 '이해된 믿음'이라 하겠다. 언제든 그 믿음은 다른 이해로 그 모습은 변모되지만, 그 지식이라는 믿음을 통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더욱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하기도, 차갑기도 한. 이것에 감히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