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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르는

사순절 Think 프로젝트 《그러므로 생각하라》

by 최서영

사랑하는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며칠 전 암으로 친구를 잃고 깊은 슬픔 속에 있었다. 나는 몇 마디 흔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먹던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내가 그녀 곁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작년에 자살로 세상을 떠난 내 친구를 어떻게 떠나보냈는지, 그리고 그 후에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 삶은 전과 후로 뚜렷이 나뉘었다. 나는 그때부터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건, 내가 어떤 답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답 없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답을 찾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면서부터 나는 아픈 이들에게 마음이 더 많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면 그 곳에는 기도할 것들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서 절로 꽃봉우리 터지듯 터지는 기도와 공감 할 수 밖에 없는 마음들이 어쩌면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아픈 상처와 고난들이 '공감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 삶이 씌여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영정사진을 보며 “신은 없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비슷한 환경에 놓였지만, 조금 달랐다. 나는 오히려 “신이 있다면 친구는 지옥에 가지 않았어요”라고 믿었다. 그래서 친구의 시어머니 앞에서, 나는 울면서 말했다. “친구를 천국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었고, 선포에 가까웠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입을 통해 그 어머니에게 친구는 지옥에 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다 믿기도 전부터, 나는 이미 조금씩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으로 삶이 바뀌어갔다. 하나님은 늘 약한 자를 택하셨다. 말이 서툰 모세, 막내였던 다윗, 비린내 나는 베드로.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이루셨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 속에는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나온다. (마태복음 21:18–22, 마가복음 11:12–14, 20–21) 이번 주일 원로목사님의 설교주제였다. 예수님이 배가 고프셔서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셨는데,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서 열매가 맺히지 않으리라” 하시고, 그 나무는 뿌리부터 말라버린다. 이 사건은 당시 제자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왜 예수님이 갑자기 나무를 저주하셨을까? 왜 이렇게 엄격하고 무섭게 느껴지는 기적을 행하셨을까? 사랑이 많으시다는 분이 귀도 없는 나무에게 혼을 낸단 말인가. 이 사건은 겉보기만 무성한 신앙에 대한 경고를 의미한다.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때가 아닐지라도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지금 내 신앙은 열매 맺을 때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때를 가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소망하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광야를 지나게 하신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신다. 그 시간은 길고 막막하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조차 병에 담아 기억하신다. 그 말이 너무 아름다워서 믿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흘렸던 그 밤의 눈물들도 하나님의 손 안에 고요히 담겨 있었을까.


가장 놀라운 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직접 하실 수 있음에도, 그분은 왜인지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지금 이 슬픔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신다. 위로의 말을 잘하는 이보다, 그저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말 잘 하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날 점심을 먹을 때도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준비 된 전도의 말도 아니었고, 상한 심령을 위로하시기 위해 나를 쓰셨다. 나는 이제 안다. 하나님의 방식은 천천히, 조용히, 잿더미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방식이라는 것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조용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아신다. 그게 내 사역이 되었음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인다.


무덤에 돌이 굴려지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한마디에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 죄로 인해 죽음에 갇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비통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비통해하셨고, 결국 큰 목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사로의 시선을 묵상하게 된다. 나사로는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움직이고 있는 게 절대 아니니까. 아니, 그 분의 뜻을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열매 맺을 때가 아님에도 열매 맺는 무화과 나무. 분명 죽어 썩은 내가 나는 몸이나 신의 비통함으로 큰 소리로 깨어난 인간 나사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절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교리도 설명할 수 없는 깊이의 사랑. 내 마음은 아직도 여전히 종종 무덤 속에 갇힌다. 죄에 젖고, 회개의 감각을 잃고, 타성에 젖어 무거운 돌을 덮은 채 살아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무거운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시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이름은 살라는 부르심.


이 기적의 끝에서, 나는 결국 십자가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죄로 인해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은 대신 죽으셨고, 나는 그 사랑 앞에 내 죄를 못 박아야 했다. 회개는, 뉘우침은, 변화의 모습을 띄고 있다.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을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슬퍼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그분을 향해 눈을 드는 것.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는 회개하고 감사하며, 다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 본 글은 한소망교회 사순절 Think 프로젝트 《그러므로 생각하라》 묵상집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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