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아빠의 얼굴

_ 언니

by 최서영

※ 본 에세이는 언니와 동생, 시인 엄마, 극작가 아빠 4인의 릴레이 에세이입니다.


나는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를 줍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바닷가에 가면 쭈그리고 앉아 조개를 구경한다. 바닷가를 수놓은 조개들을 보며 세상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다양한 색깔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작아 조개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조개를 물끄러미 관찰하는 시간이 좋았다.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은 뱃속에 아기집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때다. 아이는 그 어디에도 없고, 그저 내 피와 자궁만이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리던 때가 있었다. 생명을 가졌어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들이 존재하는구나,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인간이 피로써 부모와 자식의 형태이던 순간 말이다.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동안 품으며, 나는 인간으로의 성장 과정을 몸으로 체득했다. 시력, 청력, 미각 같은 작고 세심한 감각들이 자라나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아이의 여러 얼굴들을 상상해보았다. 어느 날은 남편의 얼굴, 어느 날은 나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이 그 어느 편이어도 무한히 사랑해줄 준비를 했다.


막상 태어나 처음 본 아이의 얼굴은 내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가 아빠 딸임을 새삼 깨달았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빠도 나만 할 때가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시간이 지나며 내 얼굴이 되었다가, 남편의 얼굴이 되기도 했지만, 입을 쩍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웃음을 짓는 아이의 얼굴이 좋다. 그 얼굴은 곧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나는 대부분 엄마의 얼굴을 닮았다고들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아빠를 처음 보면 다들 "아빠를 닮았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못난이 같은 울음을 짓는 내 딸에게 아빠는 "우리 가문의 큰 인물이 태어났구나. 넌 용감하고, 씩씩하고, 똑똑한 아이야"라고 덕담을 건넸다. 아이의 얼굴을 오래도록 관찰하며 미소 짓는 아빠의 얼굴을 나는 또 오래도록 관찰하며 미소 지었다.


가족에 대한 글을 쓰며 가장 쓰기 어려운 주제가 '아빠'였다. 어렸을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아빠의 타자기. 아빠는 좌식 테이블에 타자기를 놓고 무언 갈 계속 쓰고 있었다. 아빠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가끔 욱하며 엄마나, 나, 동생에게 화를 내곤 했지만, 대부분 아빠의 얼굴은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고 나와 동생,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아빠는 밤에 자주 야식을 해줬다. 아빠가 끓여주는 짜파게티가 너무 맛있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는 나였는데, 하루는 스누피 웹툰이 많이 들어간 철학책을 읽고 있었다. 아빠에게 나는 이런 책이 좋다고 했고, 아빠는 맞다 끄덕였다.


아침에 만화를 보다가 엄마 따라 교회로 끌려갈 때면 아빠는 언제든 교회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했다. 기술 시험을 공부하다 아빠에게 물었더니 갑자기 우주 시공간에 대해 가르쳐줬다.


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베란다에서 울고 있을 때 아빠는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와는 함부로 자지 말라"고 조언했다. 대학 수시 면접을 보러 다닐 땐 나는 아빠 뒤를 따랐다. 서울 지리도 약한 사람이, 한 번도 서울에 와본 적 없는 나를 데리고 다녔다. 아빠는 지하철에서는 남들이 눈치를 주더라도 자리를 되도록 양보하지 말라고 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말도 섞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도 했다. 대학에서 시간표를 짤 땐 매번 아빠와 상의 했다. 내 성적표 확인은 나보다 아빠가 더 빨랐다. 내가 이모네, 고모네 집에서 하숙을 할 때 아빠는 친척 동생들도 과외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라고 당부했다. 자취를 처음 시작할 때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결혼 할 때는 너의 선택을 믿는다고 했다.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을 때는 힘들면 아빠한테 맡기라 했다.


짜파게티를 먹는 날이면 아빠 생각이 난다. 그림 삽화가 많이 들어간 책을 읽다 보면 아빠가 생각이 난다. 남자친구를 만나다가도, 대학생들을 보다가도, 뚱뚱한 가방을 메고 길을 묻는 아저씨를 만나다가도,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다가도,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다가도, 이모네와 고모네 하숙을 했던 이야기를 꺼내다가도, 자취방을 알아보던 때를 회상하다가도, 남편이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 보다가도, 아이를 키우는 게 가끔 버거워질 때도 아빠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힘든 찰나로 아빠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 되고, 아이의 얼굴이 된다. 전업 작가인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렇다 할 가장으로서의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한 것을 늘 가족에게 미안해했다. 그래서 내가 중학생일 때는 갑자기 동생과 나를 가르쳐주겠다고 수학을 가르쳐주고 스피치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의 그런 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얼굴을 만든 건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표정, 찰나의 얼굴들이었다. 찰나의 얼굴들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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