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싫다 2

입시경쟁 속 저렴한 인간 이야기

by 책뚫기

나는 중학교 시절을 학교폭력 속 투명인간으로 마감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이어진 4년의 학창 시절은 내게 아주 강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남겼다.


'힘 앞에 복종하라'


나는 4년을 견뎌내었고, 고등학교 배정에 희망을 걸었다. 중학교 친구들과 갈갈이 찢어지길 기도했다. 평생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소중히 하라는 말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은 힘 있는 일진들의 소유물이었고, 나는 그들의 추억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그랬다. 내게 중학교 동기들은 죽어 사라져도 그만인 존재였다. 나는 고등학교 배정을 계기로 새로운 출발을 간절히 꿈꿨다.

당시는 아직 '고교평준화'라는 말이 떠오르기 전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친구들이 지원한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내 기억에 80% 가까운 학생들이 1차 지원한 학교에 배정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듯하다. 나는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지원했고, 일진들은 놀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그렇게 중학교 일진들과 인연은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잔뜩 긴장스런 마음으로 고등학교 교실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내가 복종해야 할 힘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았다. 중학교가 내게 준 졸업 선물이었다. 나는 어느새 노예처럼 주인을 찾고, 그 주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곳에 물리적인 힘의 주인은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고등학교, 흔히 명문고였던 이곳에서는 명문대를 꿈꾸는 아이들이 주류였다. 반면 힘쓰기 좋아하고,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은 소외되는 사회였다. 극명한 반전이었다. 이곳에서는 성적이 힘이었다.

선생님들은 전교 10위권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고, 특히 전교 1등 아이가 공부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애썼다. 반면 성적이 하위권인 아이들에게는 유독 가혹했다. 숙제를 안 하면 때리고, 시험을 못 보면 때리고, 졸면 때리고, 질문에 답을 못하면 때렸다. 가끔은 새로운 매를 써보고 싶다고 때리고, 전날 술 먹고 힘들다고 때리고, 기분 나쁘다고 때리고, 그냥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다.


명문고였으나 급식은 저급했다. 한 번은 지역 신문에 우리 학교 급식이 기사화되었다. 기사에 실린 명문고의 계란탕이 특히 화제였다. 사진 속 계란탕에는 허여 멀 건한 국물, 점처럼 찍힌 계란 덩어리가 전부였다. 계란 향을 첨가한 물에 가까웠다. 나는 살기 위해 먹는 터라 고등학교 급식이 원래 그러려니 했는데, 생업에 바쁜 우리 부모님도 그 소식을 알게 된 걸 보면 기사가 꽤 화제였던 건 분명하다.

전교에 소문이 돌았다. 기사가 났으니 급식이 나아질 거란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달까? 나는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전교 1등이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전교 1등은 학교의 급식이 불만족스러우니 개선해달라는 내용을 적고 그 아래 서명란을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모든 반을 돌며 서명란을 채워갔다. 학교는 즉각 반응했다.

교장 선생님은 전교 1등을 불러 독대했다. 전교 1등의 목소리는 곧장 교장 선생님에게 전해졌고, 교장 선생님은 전교 1등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당시 우리 학교 재단이 소유한 사업이 여럿 망했다. 수익이 나는 몇 안 되는 사업 중 하나가 고등학교였고, 아마 무리하게 수익을 늘리기 위해 급식의 질을 조절했으리라. 교장 선생님은 학교 방송을 통해 급식을 개선하겠다고 했지만, 학교 급식은 개선되는 척했을 뿐이었다. 전교 1등도 포기했는지, 그 이상 서명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나. 나는 공부에 노력을 쏟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괴로웠다.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들은 상위권을 위해 수업을 준비했고, 하위권을 위해 매를 준비했다. 상위권도 하위권도 아닌 내게 준비되어 있는 건 없었다. 상위권을 위한 수업에 나를 맞추거나, 그렇지 않으면 매 맞을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수업을 이해했고, 그보다는 자주 매를 맞았다. 대부분은 투명인간이었다.

나는 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 잠을 줄였다. 선생님들에게 매달려 문제지를 추천해달라 했다. 상위권 아이들이 푸는 문제지를 따라 사기도 하고, 그들의 공부 스케쥴러를 보여달라 부탁했다. 잠을 줄여도 그들의 공부량을 따라갈 수 없어 울고, 그들의 성적을 따라갈 수 없어 울고, 세상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깨닫고 울었다.





시간이 흘러, 나의 성적은 중상위권이 되었다. 중상위권이 되어 좋은 점은 딱 하나, 선생님들의 수업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수업을 이해하지 못한 친구를 위해 그의 수준을 확인하고, 필요한 설명을 해주려 노력했다. 그때부터 나는 '교사'라는 꿈을 꾸었다. 장난감이 아닌,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얼마 앞두고 친구들과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한 친구가 말했다.


"야, 너는 왜 교육대를 갈려고 하냐? 네 정도 성적이면 명문은 아니어도 인 서울은 할 수 있을 텐데."


물론 나는 부모님의 형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살이는 애당초 꿈꿔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꿈은 교사였다. 그건 무너졌던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교사는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내 고향에서도 가능했다. 그래서 답했다.


"교사는 내 꿈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꿈? 명문대가 아니어도 인 서울 하면,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꿈같은 생각 말고 후회하지 않게 잘 생각해봐."


내 꿈이, 내 존재의 의미가 돈보다 하찮다는 말에 울컥 화가 났다. 그래서 옆에 있는 찬웅(가명)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찬웅이는 상위권을 놓친 적 없는 친구로 의대를 목표로 하는 친구였다. 성격도 온화하고 말투도 차분해서, 많은 친구들이 믿고 좋아했다. 게다가 어른스러워서 존경하게 되는 면도 있었다. 어른스러운 찬웅이라면 내 말을 이해해주리라, 말을 꺼냈다.


"찬웅아. 내 꿈이라는 데, 돈이랑 비교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찬웅이가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결국 중요한 건 돈이야.



아 그렇구나. 다 돈 때문이구나. 학교 급식이 저급한 거도, 선생님들이 전교 10위권 아이들을 애지중지 하는 거도, 선생님들이 학교의 위상을 위해 하위권을 때리는 거도, 부모님들이 명문고에 보내는 거도, 아이들이 명문고에서 공부하는 거도, 다 돈 때문이었구나. 왜 나만 몰랐지? 왜 나만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 왜 나만 존재의 의미를 따지고 있지? 나만 어른스럽지 못한 건가? 나만...?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제야 뉴스에 학교폭력과 입시경쟁이 아이들을 앗아간다는 이야기가 무르익었다. 학교폭력과 입시경쟁으로 자살하는 아이들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위선자들'


나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냉소를 지었다. 내게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라 일진들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쳐준 건 부모들이자 교사들이었다. 나를 꿈과 존재의 의미가 아닌 성적과 돈으로 가치 매긴 거 또한 부모들이자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힘이 없으면 자신을 죽여 장난감이 돼라 가르쳤고, 그들은 성적과 돈이 없으면 맞아 죽으라고 가르쳤다. 죽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렸지만, 나는 죽기 싫었다.

아이들에게 죽으라고 가르쳐놓고 막상 죽으니 문제라고 떠들어대는 사회가 모순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을 싫어하면서,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대를 선택한 나도 참 모순이었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건가? 인생과 모순은 동의어인가? 참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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