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소개하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인간과 사람, 두 단어를 저는 지금껏 같은 의미로 사용했는데요.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해요. 예를 들어 노예는 인간이지만 사람은 아니라고 해요.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속 여성은 인간이지만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인간 사이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인간이지만, 인간 모두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건데요.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소개할 책은 인류학자 김현경 님의 『사람, 장소, 환대』입니다. 인류학자 김현경 님의 눈을 빌려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려고 해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한 종이예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볼까요? 다른 동물들은 자기 보존의 욕구에 충실해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애를 쓰지요. 반면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타인의 인정을 욕구하기도 해요.
인정을 받기 위해 인간은 집단,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해요. 공동체 속에서 안정된 자리를 가지면 타인의 인정을 받기 무척 수월해지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가족에서 엄마, 직장에서 대리와 같은 자리를 얻으면 매일매일 타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요. 따라서 공동체가 인간의 이름을 불러줄 때 인간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해요.
그런데 한 번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평생 사람으로 사는 건 아니에요. 만약 어떤 사람이 저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세 사람, 끝내 주변 모든 사람이 저를 돼지라고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저는 돼지가 되고 말아요.
정리해 볼게요. 사람이란 말의 핵심은 관계에 있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에 있어요. 즉 매일매일 사람대접을 받아야만 사람이 되고, 사람대접이 끊기는 순간 사람이 아니게 되어요.
김현경 님은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고 표현해요. 자기 자리가 있는 사람은 매일매일 자기 자리에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된다. = 공동체 안에 자기 자리/장소를 갖는다.
사람이란 공동체 안에 자기 자리/장소를 갖는 존재예요. 따라서 공동체의 역할은 개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울타리를 둘러주는 거예요.
사람에게 자리/장소는 무척 중요해요. 우리는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장소에서만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반면 자기 자리/장소를 벗어나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에요.
만약 독자 님을 사람 대접하는 사람이 가족뿐이라면 독자 님이 누릴 수 있는 공동체는 무척 작을 거예요. 반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독자 님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독자 님이 누리는 공동체는 전 세계가 되겠지요. 이처럼 독자 님이 사람대접받을 수 있는 자리/공간을 곧 공동체(사회)라고 할 수 있어요.
…
‘더럽다’
더럽다는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으로 장소와 관련된 말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신발이 신발장에 있으면 괜찮지만 침대에 있으면 더럽다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사람에게 ‘더럽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예를 들어 흑인이 백인 구역에 들어오면 ‘더럽다’며 쫓아내던 시절이 있었어요. 아침부터 장애인이 손님으로 오면 가게 주인이 ‘더럽다’ ‘재수 없다’며 쫓아내는 경우도 있었고요.
앞서 말했듯 사람이란 공동체 안에 자기 자리/장소를 갖는 존재예요. 그 관점에서 ‘더럽다’는 말은 굉장히 아픈 말이에요. ‘더럽다’는 건 ‘여기는 네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는 말이고 동시에 ‘여기서 너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이니까요.
조금 더 들어가 볼게요. 사람에게 ‘더럽다’고 말할 때는 그 안에 권력관계가 숨어 있어요. 백인은 흑인에게 더럽다고 말하지만 흑인은 백인에게 더럽다고 하지 못해요. 가게 주인은 장애인에게 더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장애인이 그랬다가는 큰일을 당할 수 있어요.
따라서 누군가에게 ‘더럽다’라고 말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사회에도 사람에게 ‘더럽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어떤 차별이 존재하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요?
1장에서 말했듯 인간은 독특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바로 타인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집단,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해요.
그런데 상상해 볼게요. 아직 아무런 공동체가 없는 세상에 두 인간이 서 있어요. 두 인간은 모두 타인의 인정을 욕구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한 상태예요. 다른 공동체가 없기에 서로 외에는 대안도 없어요. 이 둘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해요. 누구라도 한 명이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어야 해요. 상대에게 어서 오라며 자리를 내어주어야 해요. 다시 말해 ‘환대’해주어야 해요. 물론 상대가 무시할 수도 있고, 놀라서 도망가버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누군가의 ‘환대’가 먼저 있지 않고서는 두 인간이 사람이 될 가능성은 없어요.
공동체가 탄생하려면 누군가 먼저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주어야 해요. 아직 자신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타인을 인정하는 누군가가 필요해요. 이런 ‘환대’를 바로 ‘절대적 환대’라고 해요.
…
‘환대’가 무엇인지 정리해 볼게요. 환대란 타인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를 뜻해요. 환대의 목적은 나 또한 환대받기 위함이에요. 내가 타인을 환대해야 타인이 사람이 되고, 그러면 나 또한 환대받을 가능성이 열리니까요. 그런 점에서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 받는 사람이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김현경 님은 ‘환대’를 ‘절대적 환대’와 ‘조건부 환대’로 구분해요.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절대적 환대’인데요. ‘절대적 환대’와 ‘조건부 환대’가 무엇인지 알아볼게요.
…
김현경 님은 절대적 환대에는 세 항목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첫째,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예요. 신원을 묻지 않는다는 건 출생과 더불어 사람임을 인정한다는 거예요. 즉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환대를 받아 곧장 사람이 되며, 국가 또한 아이에게 국민이란 자리를 주지요.
신원을 묻지 않는다는 건 공적 공간에서 우리 모두가 의례적으로 평등하다는 뜻이기도 해요. 돈이 많든 적든, 나이가 많든 적든, 성별이 어떻든 우리는 상호 간에 예의를 지켜요.
더 나아가 신원을 묻지 않는다는 건 개인의 ‘정체성 서사 편집권’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이 어제는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했어요. 그런데 또 오늘은 이성애자라고 말하네요. 우리는 이를 인정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편집하기 때문이에요. 즉 중요한 건 서사의 내용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이에요. 그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편집하든 저렇게 편집하든 우리는 그 사람의 자리를 보존해주어야 해요.
둘째,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예요. 독자 님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가 보답을 요구했다면 독자 님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신생아는 보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의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속에 사람이 되어요.
만약 보답을 요구한다면 그건 ‘환대’가 아니라 ‘증여’라고 해요. 증여란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를 말해요. 받는 사람이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환대와 달리, 증여는 주는 사람은 주기만 하고, 받는 사람은 받기만 해요. 그렇기에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어요. 그리고 주는 사람은 자신의 증여가 기억되기를 바라요. 즉 받는 사람이 고마워하기를 바라는데, 고마워한다는 건 ‘잊지 않는다’는 뜻이래요.
보답을 요구하는 증여는 받는 사람에게 ‘빚졌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대표적인 예가 유교의 충과 효 사상이라고 해요. 백성들은 왕에게 생명을 빚졌고, 자식은 부모에게 생명을 빚졌다는 게 충과 효 사상의 핵심이에요. 왕과 부모는 이 빚을 백성과 자식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왕과 부모에게 큰일이 생기면 백성과 자식들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왕과 부모를 구해야 해요.
보답을 요구하는 증여를 ‘조건부 환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 있을 자리/장소를 주지만 조건이 붙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돈 못 벌어오면 아버지가 아니다.’ ‘밥 안 해주면 어머니가 아니다.’ ‘공부 못하면 자식이 아니다.’는 모두 조건부 환대에 해당하는 말이에요.
‘조건부 환대’는 ‘지속적 적대’라고 볼 수도 있어요. 조건부 환대에 놓인 사람은 자신이 공동체에 있을 자격/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애써야 해요. 자칫 자격/조건을 채우지 못해 자기 자리/장소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죠. 따라서 이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감시와 협박과 같은 지속적인 적대 관계에 놓여있는 셈이에요.
셋째, 복수하지 않는 환대예요. 복수하지 않는 환대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살인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하더라도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한다는 뜻이에요.
우리나라 또한 많은 나라들처럼 절대적 환대의 관점에서 형벌을 정한다고 해요. 죄를 지었다고 해도 우리나라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형벌의 경중을 피해자가 받은 고통이 아닌, 가해자의 관점에서 계산한 이익과 손해에 따라 결정한다고 해요. 형벌의 목적이 “피해자분들 마음 아프시죠? 국가가 대신 가해자에게 복수해 줄 테니 마음 푸세요.”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이익보다 손해가 크니 죄짓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다는 뜻이래요. 따라서 형벌은 사회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게 아니고, 사회가 가해자를 여전히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계약에 따라 형벌을 이행하는 거예요.
만약 국가가 피해자 대신 가해자에게 복수한다면, 그 순간 국가는 가해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복수는 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인격을 자신보다 낮은 위치로 떨어뜨리기 때문이에요.
우리 사회는 평등한가요? 불평등한가요? 독자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린아이들이라면 평등하다고 답하겠지만 고된 사회생활을 겪어본 어른들은 평등하다고 답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럼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려볼게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하고 소중한가요? 신분, 직업, 연봉, 외모, 성별과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이 질문에는 ‘그렇다’ 또는 ‘그래야만 하지!’라고 생각하실 듯해요.
참 아이러니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엄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실제 우리 사회 속에는 수많은 불평등이 존재하니까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김현경 님은 사회를 크게 두 차원으로 구분해요. 하나는 구조 차원, 다른 하나는 상호작용 질서 차원이에요.
구조 차원이란 사회를 정치·경제·문화·법 등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보는 거예요. 사회를 구조로 보면 사회 속에서 지위와 역할 그리고 자본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알 수 있다고 해요.
쉽게 풀어볼게요. 사람은 구조 속에서 특정 지위를 얻어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요. 예를 들어 임용고시를 통과한 개인은 ‘교사’라는 지위를 얻어 ‘학생을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요. 그 결과 일정 금액의 ‘돈’을 분배받게 되지요.
구조 안에서 사람은 사회와 일종의 계약 관계에 놓여요. 계약 조건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그 대가로 자본을 분배받는 셈이에요. 그리고 그 계약에 따라 불평등이 정당화되어요. 개인이 노력 끝에 의사가 되었다면 돈을 많이 버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노력을 하지 않아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다면 돈을 적게 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즉 우리는 구조 속 계약에 따라 불평등은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여요.
다음은 상호작용 질서 차원이에요. 이때는 사회를 상호작용 의례가 오고 가는 장으로 보는 거예요. 구조 속에서는 ‘계약’이 중요한 반면, 상호작용 질서 속에서는 ‘인격’이 중요해요.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인격’은 동등하기 때문에 상호작용 질서 차원에서 개인은 동등한 관계를 맺게 되어요.
쉽게 풀어볼게요. 사람은 늘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장소에서 사람들과 환대를 주고받아요. 직장 속 직원들과, 취미 공간 속 동료들과, 가정 속 가족들과 매일매일 인사와 일상 대화를 주고받아요. 일상 대화를 나눌 때는 구조 속 계약과 상관없이 평등한 대우를 받아요. 신분, 직업, 연봉, 외모, 성별과 상관없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길을 걸으며, 밥벌이와 상관없는 시간에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말과 행동을 주고받아요. 만약 기업 회장이 커피를 먹을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길을 함께 걸을 때도, 직장이 아닌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회장 대우를 요구하면 ‘갑질 논란’에 빠지게 되어요. 반대로 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갑질 피해자’ ‘장애인 혐오 피해자’가 되지요.
이처럼 사회를 구조 차원과 상호작용 질서 두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구조 차원에서는 계약 내용에 따라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반면, 계약에서 벗어난 상호작용 질서 차원에서는 모두가 동등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상호작용 의례’를 주고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잘 곳도 몸을 씻을 곳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독자 님은 잘 곳도 몸을 씻을 곳도 없는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시나요? 반대로 독자 님이 잘 곳도 몸을 씻을 곳도 없는 사람이라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요?
따라서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 차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구조의 계약에 따라 불평등이 심해지고 그 결과 불평등의 바닥에 놓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빈곤해진다면, 사실상 그들은 상호작용 의례를 주고받을 수 없어요. 상호작용 의례가 끊긴다는 건 친구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마저 끊길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가 끊겨 오롯이 홀로 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요.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 볼게요. 사람이란 공동체 안에 자기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걸 뜻해요. 따라서 공동체는 서로의 자리/장소를 인정하고 울타리를 쳐주어야 하는데 이를 ‘절대적 환대’라고 해요.
절대적 환대는 조건부 환대(증여)와 달라요. 조건부 환대는 사회가 개인을 감시하고 협박한다는 점에서 지속적 적대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사회 안에 조건부 환대가 있다는 건 사회 안에 차별이 있다는 걸 뜻해요.
반면 절대적 환대는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를 말해요. 절대적 환대가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삶, 공동체를 누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타인의 인정을 욕구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절대적 환대를 주고받으며, 즉 상호작용 의례를 주고받으며 매 순간 사람이 되어요. 절대적 환대가 끊기는 순간 우리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요. 따라서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글이 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절대적 환대를 하는데도 돈이 필요해요. 집이 없고 씻을 곳이 없다면 우리는 타인과 상호작용 의례를 나눌 수 없어요. 왜냐하면 줄 수 있는 게 없고 늘 받기만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빈곤한 사람에게는 증여(조건부 환대) 관계 속 받는 사람이란 가능성만 열리게 되어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의 (절대적 환대를 나눌 수 있는 최소 수준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야 해요. 그래야만 공동체 속 모든 인간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조건부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우리는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지속적 적대 사회’ 속에서 늘 긴장하며 살아야만 할 거예요.
...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공동체란 무엇일까?’ ‘공동체의 필수 요소는 무엇일까?’ ‘공동체의 적당한 크기는 어느 정도 일까?’ 등의 질문을 품고 있는 제게는 무척 소중한 책이었는데요. 책 내용의 밀도가 높고, 생소한 표현도 많아서 읽기도 어려웠지만 리뷰글을 쓰는 건 더 어려웠어요.
독자 님이 읽기 수월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저를 위한 글에서 멈추어버린 듯해서 아쉬움이 남네요. 그런데 분명 이 글이 씨앗이 되어 ‘공동체’에 대한 저의 고민이 깊어지고, 언젠가는 ‘공동체’에 대한 명쾌한 관점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요. 그때쯤이면 공동체에 대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유익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도 제 목소리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평안한 하루 보내시고, 애쓴 우구리에게 공감과 댓글 선물 부탁드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