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관점, 내부자의 관점
나는 대학원생도 아닌 완전 비전문가이기에 내 생각에 학문적 근거는 없다. 재미로만 읽어주시면 좋겠다.
양적 세계와 질적 세계.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에 대해 듣다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내가 정의하는 양적 세계란 타인의 관점으로 사람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세계다. 반면 질적 세계란 그 사람의 관점으로 그 사람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세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이 두 세계가 모두 존재한다.
예를 들어, 목이 아픈 환자가 정형외과를 찾아왔다. 의사는 정형외과 전문의의 관점으로 환자를 진단한다. 정형외과 의사는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X-RAY를 찍고, 환자의 뼈대와 근육의 문제를 발견하고, 깁스를 처방한다.
이는 양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형외과 전문의가 환자의 통증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전문의는 환자를 자신이 가진 전문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이를 기준으로 환자의 병명을 진단한다. 그리고 그 병 치료에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이때 환자의 최근 삶이 어땠는지, 환자의 생각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즉 환자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반면, 목이 아픈 환자가 친한 친구에게 통증을 호소했다. 친구는 언제부터 아팠는지, 어디가 얼마나 아픈 지, 잠은 잘 잤는지, 최근에 무리한 일은 없는지,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등을 묻는다. 환자는 한 달 전 이직했고, 그 이후로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친구는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은지 물었지만, 환자는 꿈에 그리던 회사고 동료들도 좋아서 매일 즐겁다고 답한다. 이어서 친구는 사무실 책상과 의자가 편한 지 물었고, 환자는 그러고 보니 의자에 앉아서 일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목이 더 아픈 듯하다고 답한다. 이에 친구는 환자의 목 통증은 '일하는 자세를 점검하라'는 의미일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는 질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친구는 환자의 통증과 관련된 정보를 묻고, 이를 환자의 관점에서 판단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환자 삶의 맥락을 알기 위해 애쓰고, 그렇게 알아낸 정보를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자의 삶의 맥락에서 환자의 통증을 해석하려 애쓴다. 이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안목을 지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즉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의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양적 세계는 우리 삶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목이 아파 정형외과에 갔더니 의사가 환자의 관점을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상상해보자. 물론 환자는 친절한 의사에게 고마울지 몰라도, 뒤에 기다리는 환자는 길어지는 대기 시간에 답답할 테다. 자동차를 사고 싶은 손님이 매장을 방문했더니, 직원이 손님의 라이프 스타일과 니즈를 묻고 그에 맞는 차를 주문 생산한다고 해보자. 손님은 자신의 삶에 꼭 맞는 자동차를 갖게 되어 좋을지 몰라도 주문에서 설계, 생산, 출고까지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야 할 테다.
따라서 짧은 시간 최대한 많은 사람의 요구를 해결하려면 양적 세계가 유리하다. 환자의 최근 삶이 어쨌든, 전문의는 자신의 전문적 안목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빠르게 보고,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처방한다. 기업은 다양한 기성품을 찍어내고, 그중에 소비자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한다.
그런데 정형외과를 찾아온 환자의 통증이 뼈대나 근육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정형외과 전문의는 환자의 병을 진단하지도, 나아가 치료법을 처방할 수 없다. 뼈대나 근육의 문제가 아니라면 정형외과 전문의의 안목으로는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형외과 전문의는 환자에게 다른 병원을 가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양적 세계에는 소외되는 사람이 있다. 원하는 게 있거나 아프더라도, 그게 대중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으면 소외될 수밖에 없다. 내가 요구하고 내게 필요한 게 있더라도, 그게 돈이 되는 범주에 들어있지 않으면 구할 길이 없다. 양적 세계에서 소수의 요구와 필요를 챙기는 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물욕이 소외되는 건 비교적 괜찮다. 내 마음에 딱 맞는 자동차가 없어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귀병을 앓고 있다면? 장애가 있다면? 내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면? 양적 세계에 나의 생존에 필요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어렵다.
양적 세계에서 소외되는 사람에게는 질적 세계가 필요하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그 사람의 관점을 수용하고, 그 사람의 관점으로 그 사람의 삶을 바라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 사람이 스스로 성장하거나 해결책을 찾게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그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학교다. 흔히 우리는 '학교란 아이가 성장하도록 돕는 기관'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 성장을 질적 세계의 성장이 아닌 양적 세계의 성장으로 해석한다. 즉 학교는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는 기관이 아니라 학교는 아이를 성장시키는 기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학교는 아이가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아이가 학교의 관점을 수용하도록 강제한다.
학교는 수많은 기준으로 아이를 평가한다. 국어과의 기준, 사회과의 기준, 수학과의 기준, 과학과의 기준, 영어과의 기준 등 이미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아이를 평가한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공부한다. 아이가 이를 잘 내면화하면 모범생, 이를 잘 내면화하지 못하면 문제아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를 잘 내면화 하든 못하든 필연적으로, 아이는, 소외된다. 학교가 아이의 관점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질적 세계에 있어야 할 거 같은 학교가 양적 세계에 있다. 어쩔 수 없다. 학교 또한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소외되는 아이는 공교육 내내 소외될 테지만,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는 데 어찌할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