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란 무엇인가?

내 목소리 내기 2

by 책뚫기

정답 맞히기 식 삶에서 벗어나 내 내면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일찍 일어나기, 10쪽 독서, 꽂힌 문장 글쓰기를 실천 중이다. 그러면서 최근 나의 교사 경험과 관련한 글을 연거푸 썼다. 10년 가까운 교사 생활을 하면서 나의 혼에 교사가 깃들었는지 교육과 관련된 책과 문장에 눈이 가고, 나는 어김없이 그 문장들을 독서 노트에 메모한다.


학교 복도를 지나가면 종종 모르는 아이가 힘차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도 반갑게 인사한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면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묻는다. 아는 선생님이야? 응! 4학년 선생님이잖아. 아마 우리 반 아이의 동생이거나, 작년 내가 가르쳤던 반 아이의 동생이거나, 뭐 그럴 거다. 하여튼 나를 아는 아이들은 꼭 뒤에 붙이는 말이 있다. 저 선생님 착해.


한동안 ‘착하다가 뭘까?’란 질문에 빠진 적이 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착해? 착하긴 착하죠. 못 생겨서 그렇지. 이런 팍 씨! 헤헤헷. 선생님이 착해? 착하죠. 키가 작아서 그렇지. 이런 팍 씨! 헤헤헷. 선생님이 착해? 착하긴 착하죠. 탈모여서 그렇지. 이런 팍 씨! 아직 탈모 아니야! 헤헤헷.


그런데 쌤이 뭐가 착하다는 거야? 예? 그냥 착하죠. 그럼 착하다는 게 뭐야? 그냥 착한 거요. 그래서 착하다는 게 뭐냐니까? 착한 거요! 어휴~ 도움이 안 돼, 도움이.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게 아이들은 ‘화내지 않는다’ = ‘착하다’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을 화내는 정도에 따라 구분하는 거 같다. 하여튼 나와 아이들의 일상은 평화롭고 장난스러운 편이다. 나는 비교적 평화롭고 재밌고 때로는 도전적인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교직과 관련하여 쓴 두 글 모두 비관적인 냄새를 폴폴 풍긴다. 애초에 태어나길 비관적인 성격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인지, 교육 현장이 내게는 때때로 너무 가혹한 소외를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완벽한 교사로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인지. 공교육에 대해 꽤 비관적인 내 모습을 발견했다.






직장을 그만두기 꺼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고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앞날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품는다. 직장이 말 그대로 생지옥이 아니라 단지 지루하거나 영감을 주지 못하는 정도일 때 이 생각은 일면 타당해 보이는 매력적인 착각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은 행동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옥보다 나을 때는 필요한 정도의 교묘한 합리화를 통해 현실을 참게 만든다. 당신은 정말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단지 바라는 바이며 행동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일 뿐인가? 나아질 것이라고 당신이 확신한다면 사실 그런 식으로 의심하고 있겠는가? 대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낙관주의로 가장한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당신은 1년 전보다, 한 달 전보다, 일주일 전보다 더 잘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의 사정도 저절로 나아지지는 않는다. 출처: 팀 페리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최원형 윤동준 옮김, (다른상상, 2017), 53-54


만약에 교육계가 주식회사처럼 투자 대상이라면, 교육계에 투자하실 건가요? 내 대답은 아니오다. 솔직히 절대 투자하지 못할 거 같다. 주식투자란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가치를 평가하여 결정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교육계가 만들어내는 가치가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자꾸 올라온다. 교사를 계속하는 게 맞나? 나는 교사로서 옳은 가치, 바른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공교육이 기존 교육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새로운 교육을 만들자는 ‘혁신학교 운동’을 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교사 주도의 수업에서 학생 중심 수업으로 넘어가려 애썼고, 아이의 학습 결과만 평가하던 일제 평가에서 아이의 학습 과정을 평가하는 과정 중심 평가로 전환하고자 애썼다. 더불어 아이를 학교가 아닌 마을이 함께 키워야 한다는 지역 마을 공동체 사업, 아이들의 삶과 꿈이 자라는 학교가 교도소 시설만도 못하다는 지적 때문에 공간 혁신 사업이 힘을 얻었다.


내 교사 경력이 10년이 다 되어가니 나는 기존 교육과 혁신학교 교육의 과도기를 겪어온 셈이다. 그래서 많이 달라졌는가? 겉으로는 많이 달라진 거 같은데, 내 개인적인 비관론은 점점 심해졌다. 사회는 점점 더 질 높은 교육을 요구했고, 동시에 교사에게서 아동 학대라는 개념으로 많은 권한을 뺐어갔다. 그러나 나의 비관론이 점점 심해진 건 교사의 처우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에 비해 아이들은 더 행복해졌는가? 예전에 비해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꿔나갈 힘을 학교 교육을 통해 잘 기를 수 있는가?



“미국의 학교 체제는 학생들이 피고용인이 되도록 교육시키지. 피고용인은 돈에 대해 알 필요가 없어. 그래서 학교에서 금융 교육을 하지 않는 거란다. 반면에 사업가는 돈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해. 사업가가 돈에 대해 모른다면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사업가는 망할 테니까 말이다.”

로버트 기요사키, 페이크, 박슬라 옮김, (미음인, 2019), 175



페이크 책의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머리가 띵하며 동시에 개운해졌다. 내가 교육을 자꾸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 ‘아이를 위한 교육’, ‘아이가 살아나는 교육과정’, ‘아이의 삶을 가꾸는 교육과정’이라 말하면서 왜 정작 아이가 보이지 않을까? 왜 소외되는 아이는 여전히 많을까? 그 답이 여기 있었다. 학교는 학생들이 피고용인이 되도록 교육시키는 기관이었나 보다.


고등학교 2학년의 수포자 비율이 32.3퍼센트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수포자 비율이 높아서 문제라는 말이 언제부터 있었을까? 수학이 어렵다는 말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종종 듣던 말이다. 내 기억만 해도 수포자 문제는 20년이 넘는 문제다. 그래서 2022년 지금 우리 교육계는, 우리 정부는, 우리 사회는 그 문제를 해결했는가? 해결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해결하지 않은 걸까?


우리 아이가 다행히 수포자가 아니라고 하자. 더 운이 좋게도 비싼 등록금을 내는 흔히 명문대학교에 입학했다고 하자. 학자금 대출을 받고, 알바를 뛰고, 가까스로 졸업하면 우리 아이가 어디에 가기를 원하는가? 대기업이다. 대기업에 취직한다는 건 무엇인가? 피고용인이 된다는 말이다. 공기업이든, 공무원이든, 대기업이든, 중견 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우리는 우리 아이가 연봉 높은 피고용인이 되기를 꿈꾸며 학교를 보낸다.


피고용인을 고용하는 기업 입장에서야 수포자가 30퍼센트가 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기업이야 말 잘 듣고 똑똑한 피고용인을 선발하면 그만이다. 학생들이 수학 때문에 고통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들을 패배자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학교 교육의 맹점

1.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실수를 저지르면 멍청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실수를 저질러야 더 부자가 될 수 있다.

2. 학교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부정행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사업과 투자는 팀 스포츠다.

3. 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똑똑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은행가는 성적표를 보여 달라고 묻지 않는다.

4. 학교에서는 빚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빚은 부자를 더 큰 부자로 만든다.

5. 학교에서는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고 가르친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 부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로버트 기요사키, 페이크, 박슬라 옮김, (미음인, 2019), 242-246



학교에서 강조하는 가치 중 하나는 ‘민주주의’다. 모든 의사결정은 민주적으로, 학급에서 규칙도 민주적으로, 한 아이의 목소리도 소외되지 않도록 민주적으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몰라서야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동시에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 아닌가? 왜 학교에서 자본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걸까? 왜 학교에서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 걸까? 기껏해야 여전히 용돈 기입장 쓰는 법을 가르치는 수준이다.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 근검절약한다. 를 가르치는 수준이다. 왜 그럴까? 미래의 피고용인이기 때문일까?


교사란 무엇인가? 교사란 학생이 피고용인이 되도록 교육하는 사람이다.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여,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표대로, 정해진 학습 내용을, 정해진 방법과 절차에 따라 해결하도록 만든다. 정해진 대로 잘 따라오면 우등생, 정해진 대로 잘 따라오지 못하면 부진아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장차 우등생은 연봉 높은 피고용인으로, 부진아는 연봉 낮은 피고용인으로. 순리대로 흘러갈 거다.






에이씨! 그런데 나는 이런 걸 꿈꾸며 교사가 된 게 아니다.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을 학교 폭력과 수능 전쟁으로 기억한다. 소외된 나의 학창 시절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좋은 선생님을 꿈꿨단 말이다! 아이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가꾸고, 그 목소리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나는 늘 답답했다. 국어 진도를 못 따라간다고 수학 진도를 못 따라간다고 억지로 학교에 남겨서 나머지 공부를 시킬 때마다, 이게 정말 아이를 위한 일인가? 이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진도를 따라가기는 어려울 거 같은데. 왜 이 아이는 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창 시절 내내 부진아 타이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태어난 게 죄인가?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따라가지도 못할 교육과정을 강요하면서 나머지 공부로 아이를 옥죄는 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런데 이 구조는 진짜 아이를 위한 마음이라도 있었던 건가? 학교는 정말 피고용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 그래서 따라가지도 못하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놓고 고칠 생각은 없었던 거 아닌가? 나머지 공부를 강요함으로써 포기하지 않았다는 명분만 쌓아온 거 아닌가? 에이씨!



사진을 보니 언제 아팠냐는 듯 되살아난 은행나무가 푸른 잎들을 싱싱하게 뽐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에게 당부했었다. 나무가 낫더라도 한동안 발길을 끊어선 안 된다고, 나무 한 그루를 돌볼 땐 평생 가져갈 인연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나무 관리를 일임받은 그는 내 말을 잘 새겨들은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오가며 예후를 살피다가 마침 내게 사진을 보내온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도 그 친구는 은행나무와 맺은 인연을 평생토록 이어 가지 않을까.

출처: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메이븐, 2019), 64


나는 이런 삶을 기대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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