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맞히기 식 삶에서 벗어나기
심판이 손을 들어 동전을 보여준다. 그림이 그려진 앞면과 숫자가 써진 뒷면이 보인다. 심판이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하늘을 향해 던진다. 핑그르르. 순간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사라진 듯 작은 공이 된다. 그 세찬 에너지를 품고 동전은 결국 추락하여 심판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심판은 잡은 동전을 다른 손등 위에 올려놓는다. 심판이 덮은 손을 떼어 동전의 앞면 또는 뒷면이 드러나는 순간 운명이 결정된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장 폴 사르트르
나는 사르트르가 어떤 철학자인지 모른다. 그저 유명한 명언이라고 소개하여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다. 인생은 늘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작게는 오늘 저녁에 먹을 음식부터 크게는 배우자 선택까지. 좋은 선택들이 쌓여 좋은 인생을 만들고, 나쁜 선택들이 쌓여 나쁜 인생을 만든다. 그럼 내가 좋은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을 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평가와 판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선택, 평가, 판단은 그 사람이 가진 기준에서 나온다. ‘안전이 중요한 기준인 사람’은 세상을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으로 구분하고, 안전한 것을 선택할 거다. ‘도전과 모험이 중요한 기준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하고, 심장 뛰는 무언가를 선택할 거다.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이 가진 기준이 곧 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좋은 선택을 하려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잘 알고, 나아가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선택해야 할 테다.
나의 시선을 조금 더 올려볼까? 드론을 띄워보자. 조금씩 조금씩 하늘로 하늘로.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세상. 넓게 펼쳐진 세상이 장관이다. 이제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이고,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가 보인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나를 넘어 사회가 좋은 선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선택이야 나의 기준에 따라 하면 그만이지만, 수많은 개인이 모인 사회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 좋은 기준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나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다. 초등학교는 늘 학생을 평가하고 판단하여 학생에게 필요한 교육을 선택하는 곳이다. 학생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가르칠지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는 수많은 기준이 있다. 학교 교육과정이라는 기준으로 학생들이 몇 시까지 등교해야 하는지, 몇 시에 1교시를 시작하는지, 쉬는 시간은 몇 분 인지, 급식 시간은 언제인 지 등을 선택한다. 또한 진단 평가를 보고 아이가 몇 문제를 틀리면 부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도서실에서 아이가 책을 몇 권 빌리면 다독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학급에서 아이가 어떤 언행을 하면 교권 침해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이 납득할만한 수준에서 합의한 결과물인 듯하다.
아! 그러니까 사회가 가진 기준은 구성원들이 납득할만한 수준에서 결정되는 거 아닐까?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이 정도면 됐어.’ 또는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수준이 우리 사회의 기준인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사회가 가진 기준이라는 건 좋은 거도 나쁜 거도 아닌 듯하다. 단지 합의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 나의 글에서 드러나지만, 나는 대한민국 학교 교육에 굉장히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비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비관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생각하는 교육 기준과 현재 학교 교육 시스템이 가진 기준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교육에서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을 돕는 게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데, 학교 교육 시스템은 학생을 피고용인으로 만드는 게 중요한 기준일 뿐이다. 그리고 그게 우리 사회가 합의한 기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학교를 통해 적어도 피고용인으로써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합의가 담겨있다.
심판이 손을 들어 동전을 보여준다. 그림이 그려진 앞면과 숫자가 써진 뒷면이 보인다. 심판이 손가락을 튕겨 동전을 하늘을 향해 던진다. 핑그르르. 순간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 사라진 듯 작은 공이 된다. 그 세찬 에너지를 품고 동전은 결국 추락한다. 이런! 심판이 동전을 놓쳤다. 동전은 핑그르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바닥으로 추락한다. 팟! 동전이 섰다! 부드러운 바닥에 꽂힌 동전, 동전은 하늘을 향해 자신의 옆면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좋다’와 ‘나쁘다’라는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정신에서 해방되어 마음에 충실하게 살수록 ‘선 안에 악’이 있고 ‘악 안에 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에 나는 공개적으로 “시장 붕괴가 오길 바란다.”라고 말했다가 집중포화를 얻어맞은 적이 있다.
진짜 투자자라면 시장 붕괴의 장점과 단점을 골고루 볼 수 있어야 한다. 가짜 투자자는 판타지 세상에 살면서 주식 시장 붕괴가 나쁜 것이라고 믿는다.(혹은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투자에 가장 적절한 시기는 시장이 붕괴한 직후다. 가짜 투자의 세상에서 시장은 상승할 뿐이고 절대로 붕괴하지 않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출처: 로버트 기요사키, 페이크, 박슬라 옮김, (미음인, 2019), 370
나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을 즐겨 인용하곤 한다.
“최고의 지성은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을 품고도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해석: ‘옳다/틀리다’라는 양분된 개념으로 사고하는 순간, 당신의 지능은 절반이 된다. 동전의 옆면에 서서 -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면을 모두 볼 수 있게 - 본다면 지능을 높일 수 있다.
출처: 로버트 기요사키, 페이크, 박슬라 옮김, (미음인, 2019), 257
사람은 저마다 약한 고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들 말이다. 외모 콤플렉스, 학력 콤플렉스, 성차별 콤플렉스 등 사람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발끈하게 되거나, 우울해지곤 한다.
나는 소외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나 보다. 누군가 사람을 소외시킬 때, 심지어 그러면서 뻔뻔하면, 발끈하게 된다. 아마도 학교폭력에서 살아남았던 중학생 시절과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았던 고등학생 시절, 나의 과거 때문인 듯하다. 사람이 사람을, 이토록 잔인하게, 장난감이나 기계로 만들 수 있다니. 한동안 사람에 대한 혐오가 심했다.
그래서 나는 소외를 목격하는 순간 동전의 뒷면만 보게 된다. 이건 잘못된 거야! 나쁜 거야! 그래서는 안 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나는 소외 비슷한 거를 봐도 흥분했다.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학력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성별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제적 수준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건 절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강조한다.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소외의 장면에서 동전의 앞면을 보지 못했다. 소외 콤플렉스가 동전의 앞면을 지워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소외라는 우물 안에 갇힌 셈이다. 과거의 충격으로 트라우마가 생기면 벗어나기 어려운 것처럼.
동전에는 세 개의 면이 있다. 앞면, 뒷면, 그리고 옆면이다.
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우물에서 벗어나 동전의 옆면에 서도록 노력해보아야겠다. 가장 먼저 교육 시스템을 동전의 옆면에 서서 보아야겠다. 나는 지금껏 교육 시스템은 학생의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동전의 뒷면만 보고 살아왔다. 하지만 교육 시스템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학교를 통해 적어도 피고용인으로써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합의가 담겨있다. 교육 시스템에 담긴 동전의 앞면을 오늘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소외 콤플렉스라는 우물에서 나와 동전의 옆면에 서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전의 옆면에 서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교육 시스템은 교사를 통해 학생을 교육한다. 교사를 통해. 기계도 아니고 AI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교사를 통해 교육한다. 교사는 학생의 처지와 감정을 읽고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교육 시스템 안에서 어찌 됐든 피고용인으로서 소양을 쌓아갈 테다. 그 과정에 소외되는 아이가 분명 있을 거다. 그래서 교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소외된 아이의 처지와 감정을 읽고 능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 교사는 그래서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