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어린아이
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한이 맺혔다'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그 '한'이라는 게 마음속 어린아이의 좌절이라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유롭고 밝은 사람을 보고 '맺힌 데가 없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마음속 어린아이의 만족이라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학교 가는 일보다 농사일이 먼저였다. 그는 장남으로서 묵묵히 농사일을 도왔고, 꾀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또한 묵혔던 꿈을 펼치고픈 청년이 되었다. 그는 식물을 사랑했고, 조경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아마 식물로 도시를 가꾸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기도 모를 미소를 지었을 테다. 그러나, 식상하지만,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꿈을 포기했다. 그의 친구들 중 몇몇은 대학에 진학했고, 삶의 대비는 그의 마음속 그늘을 더 짙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는 좌절하고, 혼자가 됐을 테다.
그는 관심도 없고 경험도 없던 방직회사에 취직했다. 아니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취직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테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내가 태어났다. 그는 가장이 되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출근했다. 경력이 쌓이며 직장 후배가 생겼고, 후배의 부주의로 불이 났다. 중요한 기계 하나가 불에 타 사라졌다. 아버지는 상사로서 책임을 져야 했고, 월급과 지위를 강등당했다.
그래도 그는 가장이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출근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는 늘 술에 취한 채 퇴근했고, 퇴근하자마자 늘 나와 내 동생을 안방으로 불렀다. 나와 내 동생은 굳은 자세로 앉아 그의 말을 몇 시간씩 들었다. 그는 공부하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건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는 나와 내 동생에게 자신의 한을 대신 풀어달라 간절히 요청했다. 그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마음속 어린아이를 나와 내 동생에게 보살펴 달라는 요구였던 셈이다.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의 간곡한 요청은 내 마음속 어린아이의 일부가 되었다. 운이 좋게 나는 괜찮은 머리를 타고났고,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칭찬과 인정을 원했기에 나는 공부에 몰두했다. 나는 그 어렵다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네다섯 시간만 자고 공부하면 어느 정도 인정받을만한 머리가 있었고, 덕분에 나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도 나의 성과에 진심으로 기뻐했고, 만족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의 한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무척 좋다. 그 어린아이는 노력할 줄 알고, 대가 없는 칭찬을 바라지 않으며, 노력에 대한 칭찬에 너무나 순수하게 기뻐할 줄 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가 무척 좋다. 물론 그의 어린아이를 외면하고, 증오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아이는 인내할 줄 알고, 대가 없는 보상이나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으며, 소중한 사람에게 자기 삶의 모든 지혜를 아낌없이 나누려 한다. 무엇보다 그 작은 어린아이가 외로운 한을 품은 채 수십 년을 견뎠고, 그게 다 가족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의 어린아이를 더는 미워할 수 없다. 외면하고 증오했던 기억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상하게 그가 더 커 보이기까지 하는 듯하다.
나는 지금 결혼하여 출가했기에 명절이나 누군가의 생일이 있을 때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건강한지, 주식은 어떻게 돼가는지, 직장 생활은 어떤지, 그리고 내 와이프 배 안의 담박이(태명)는 어떤지, 내 와이프의 건강은 어떤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별 거 아닌 유치한 농담에 우리 둘은 소리 내어 웃는다. 아버지의 어린아이와 나의 어린아이는 비로소 친구가 되었고, 아버지와 나는 '맺힌 데 없는' 사람에 가까워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