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직장 상사와 한판 승부

찌질이 vs 찌질이

by 책뚫기

자기 마음속 어린아이를 돌보는 건 참 어렵다. 타인과 갈등을 피하려고 자기 마음속 어린아이의 상처를 외면하다 마음에 병이 생기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 마음속 어린아이에게 이른 자유를 주어 다른 이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어릴 때야 상관없지만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면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네가 아직도 어린애냐? 찌질하게"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참 마음에 안 드는 남자 상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리 기관의 최고 책임자이자 권력자였고, 나는 그를 골목대장이라 불렀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여성이 다수였는데 그는 툭하면 '우리 남자들'이란 표현을 즐겨했고, 우리 기관이 잘 되려면 남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그는 남자들만 참여하는 남자 친목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거기서 그는 대장 노릇을 했다.

직장 남자 선배들은 골목대장의 기분을 그리도 잘 맞추었다. 골목대장은 매달 운동 경기로 내기를 하고 내기에서 진 팀이 회식비를 내자고 했기에, 선배들은 골목대장의 기분에 맞는 운동 경기와 회식 장소를 몰색 했다. 게다가 골목대장은 내기에서 지는 걸 싫어했기에 선배들은 종종 찾아오는 싸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기려 애썼다.

막내였던 나는 가뜩이나 부족한 월급을 내기로 날릴 때마다 분하고 억울했다. 싫어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데 돈까지 잃어야 한다니,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 내 마음속에는 미움과 조롱의 말이 가득했다.


'나이만 먹었지 완전 애네 애야. 나이 먹고 외로우면 놀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할 것이지, 그 나이 먹고도 골목대장질 하면서 후배 돈으로 놀고 싶을까? 자기 마음속 애 하나 컨트롤 못하면서 조직을 이끈다고? 어휴 찌질하다 찌질해.'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인터넷으로 무료 성격유형검사(MBTI)를 했더니 '잔다르크형(INFP)'이 나왔다. 전혀 나답지 않은 유형이어서 몇 번이고 다시 해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타인이 나의 이상향을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할 때 매우 예민해진다'는 잔다르크형, 이는 골목대장을 대하는 나의 마음속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어느덧 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있는 골목대장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찌질한 골목대장이 인간적으로 미워지기 시작하자 기관 권력자로서 골목대장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잔다르크가 되어 터져 나왔다. 나는 골목대장이 막무가내로 지시한 업무 지시서를 들고 골목대장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지시한 업무에 대한 본인의 비전, 구체적인 추진 계획, 확보한 자원이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하였으나 터져 나오는 감정적인 말투와 어조 속에 '왜 일을 이따위로 지시하냐?!'는 메시지가 담기고 말았다. 골목대장이 답했다. '딱히 생각해보진 않았고 우리 조직에 좋은 거니까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지시했다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어버리고 말았다.


골목대장과 나의 한판 승부 소식은 직장 사람들에게 빠르게 퍼졌다. 직장 내를 돌아다닐 때면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자 선배들도 알게 되었다. 골목대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이 공들여 쌓은 탑을 내가 와르르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게 화를 내지도, 타박하지도, 조언하지도 않았다. 내 등을 살포시 토닥이거나, 어깨에 손을 잠시 올려놓거나, 짧은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다."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너무 미안했다. 나는 남자 선배들도 찌질하다고 생각했다. 찌질한 골목대장의 찌질한 행동대장들. 선배들이 줏대도 없이 골목대장의 작은 왕국 놀이에 놀잇감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로소 남자 선배들이 웃고 즐기며 남자 모임을 준비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남자 선배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속 어린아이를 잘 보살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으로서 골목대장의 어린아이까지 돌보아주었던 거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찌질하다고 생각했는데, 찌질한 건 골목대장과 나뿐이었다. 마음속 어린아이에게 최고 책임자의 권력을 주어 대장 놀이를 했던 골목대장, 그리고 마음속 어린아이의 상처를 외면하여 곪게 만들었던 나. 골목대장과 나의 한판 승부는 각자의 어린아이를 돌보지 못한 찌질이 두 명의 투닥거림이었다.


나는 여전히 골목대장을 싫어한다.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골목대장을 싫어하기에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할 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니란 사실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찌질하다. 그래서 그 찌질이를 잘 보살피기로 했다. 찌질하지만 그래서 귀엽기도 하고, 마음이 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게 내 진짜 매력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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