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1편에서 이어집니다.
짧은 겨울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1월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동급생 ‘힌딩어’가 얼어붙은 사체로 발견됩니다. 점심시간,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놀다가 살얼음을 확인하지 못했던 탓이었습니다.
동급생 학생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습니다.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가는 힌딩어를 고통스럽게 쳐다보았습니다. 한스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건 힌딩어를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일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한스는 들것에 실려가는 힌딩어의 얼굴이 마치 하일너의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힌딩어가 아니라 하일너가 죽었다면? 한스는 하일너에 대한 죄책감을 평생 사죄하지 못했을 거란 공포에 빠졌습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태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한스는 며칠 뒤 하일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난 겁쟁이였어. 널 그냥 모르는 척했지.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란 걸 넌 잘 알고 있잖니. 난 여기 신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가능하다면 최우등생이 되려고 다짐해 왔어. 넌 그걸 공부벌레나 하는 짓이라고 비웃었지. 그래, 나도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차피 그건 내가 품고 있던 이상이었어. 난 이것보다 더 나은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단 말이야.”
“하일너, 제발! 네 주위를 이렇게 계속 맴도느니 차라리 꼴찌를 하는 편이 나을 거야. 너만 좋다면 우린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어. 다른 아이들 따위는 우리 안중에도 없다는 걸 보여주자구”
한스와 하일너는 다시 절친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한스는 ‘우월감’의 세계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스는 여전히 자기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죄책감, 양심’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최우수학생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보다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스는 점점 더 말라갔고, 학교 수업도 하나씩 하나씩 놓아버렸습니다. 최우수학생 후보였던 한스는 어느새 낙제생 문턱에 가까워졌고, 급기야 신경쇠약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 안에 서술된 사물들이 한스의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스는 버려졌습니다. 먼저 하일너에게서 버려졌습니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하일너는 학교에서 탈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찰에 붙잡혀 돌아온 하일너는 반성의 기미 없이 오히려 선생님들을 쏘아붙였습니다. 결국 하일너에게 퇴학 조치가 내려졌고, 하일너는 한스에게 잠깐의 아쉬움을 표현한 뒤 학교에서 사라졌습니다.
한스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습니다. 하일너와 친구가 되면서 다른 모든 친구들과 벽을 쌓았던 터라 한스는 정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최우수학생도 아니었기에 다른 친구들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한스는 고독한 외톨이이자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한스는 자신의 기억력이 전혀 말을 듣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경쇠약 증세는 더 심해졌고, 선생님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한스를 점점 더 세게 질책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자넨 왜 그 잘난 친구 하일너와 함께 가지 않았나?”
그 뒤 한스는 학교에서도 버려졌습니다. 의사는 한스가 신경쇠약을 넘어 정신병에 걸리고 말 거라고 진단 내렸고, 끝내 한스는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한스의 병든 영혼을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라틴어 학교(초등학교) 교장도, 라틴어 선생도, 그리스어를 가르쳐준 마을 목사도 길거리에서 한스를 만날 때에만 친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습니다.
선생들에게 한스는 그저 깨진 그릇일 뿐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도 있는 그릇이 아니었고, 다양한 종류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논밭도 아니었습니다. 한스를 위해 시간을 내거나 관심을 보인다는 건 그들에게 부질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한스는 죽음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목을 맬 나무를 정했습니다. 줄도 구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확실히 갖추어지자 오히려 평안이 깃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체념한 사람의 여유였습니다.
한스에게 남은 유산이라고는 유년 시절의 추억뿐이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두통이 없던 시절. 야릇함, 모험심, 질문이 가득했던 시절. 한스는 자신의 추억을 되짚어 마을 곳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일터로 나갔거나, 마을을 떠났거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스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피혁 공장만이 유일하게 그대로였습니다. 피혁 공장의 뜰에서 리제는 여전히 감자 껍질을 까며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리제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한스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살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저녁 무렵 피혁 공장의 뜰에서 리제 곁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 다시 피혁공장이나 <매의 거리>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만큼은 진심으로 한스를 챙겨주었습니다. 플라이크 아저씨 덕분에(?) 한스는 짧은 불장난 같은 사랑을 경험했고, 불장난 사랑의 결말인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친구 아우구스트의 도움으로 견습 기계공이 되었고, 그동안 자신이 경멸했던 노동의 가치를 이해했습니다.
친구 아우구스트가 기계공으로서 처음으로 주급을 받은 날, 한스는 아우구스트의 축하파티에 초대받았습니다. 한스는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고, 밤늦은 시간에 불안한 걸음걸이로 힘겹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다음날, 한스는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길을 잃고 가파른 언덕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아니면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다가 몸의 중심을 잃었는지, 아니면 아름다운 강물에 이끌려 그 위로 몸을 굽혔는지, 아니면 평화와 안식을 찾아 죽음의 그림자에 휘말려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부끄러움이나 괴로움도 모두 한스에게서 떠나버렸다는 겁니다.
차라리 한스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요? 한스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한스가 노동을 경멸하지도 않았을 거고, 일찍이 노동의 가치를 이해했을 겁니다.
한스의 ‘우월하고 싶은 욕구’는 그를 수공업의 장인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릅니다. 한스는 수레바퀴에 깔릴까 봐 발버둥 치느라 두통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거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바짝바짝 말라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가장 놀랐던 점은 한스에게서 저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1890년대 라틴어 학교·신학교의 모습과 2000년대 초등학교·중학교의 모습이 닮았다니… 한스가 저 같아서 마음 아팠고, 제가 한스 같아서 마음 아팠습니다.
물론 저는 한스만큼 재능이 출중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스처럼 아무도 저의 영혼에 관심 가져주지 않았고, 이데올로기는 제가 저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늘 ‘인풋 전문가’가 되라고 요구했고, ‘아웃풋 전문가’는 별종 취급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0년대 학교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아이가 자기 내면을 가꿀 여유와 기회를 보장하나요? 아니, 그전에 우리 스스로 자기 내면을 가꾸고 있나요? 우리 아이들의 주변에 자기 내면을 잘 가꾼 어른들이 가득한가요? 우리 아이들은 내면이 아름다운 어른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나요?
이도저도 아니면 우리 아이들은 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형편인가요? 우리 아이들의 보호자는 부모님인가요? 어린이집 선생님인가요? 우리 아이들은 보살핌을 받고 있나요? 관리를 받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