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 세상에는 원래 경계가 없다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by 책뚫기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인생을 바꾸는 ‘우물 밖 청개구리’ 우구리입니다.


l 우리는 늘 선(경계)을 긋는다.


짧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누구나 자기만의 ‘선’을 긋고 살아가더라고요. 어떤 분은 자기로부터 한참 멀리 선을 그어두어서 좀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반면, 어떤 분은 자기와 선이 붙어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갑니다. 어떤 분은 그어둔 선이 무척 두꺼워서 늘 그대로인 반면, 어떤 분은 그어둔 선이 가늘어서 종잡기 어렵습니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타인이 그어놓은 선을 빨리 알아차리고, 그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유머러스한 사람은 타인이 그어놓은 선을 넘을 듯 말 듯 넘지 않으면서, 마침내 타인이 그어놓은 선을 말랑말랑하게 풀어버리는 사람인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만 선을 긋고 살아가는 건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문화, 제도도 선을 긋습니다. 예를 들면 법, 규칙, 예절, 상식, 유행, 인싸, 인기 등이 그런 선들입니다. 우리는 처벌받지 않으려고, 때로는 편하려고, 때로는 인정받으려고, 때로는 유명해지려고 세상이 그어놓은 선과 거리조절을 합니다. 다만 그 거리조절이 여간 쉬운 게 아니라서 늘 부딪치고 깨지곤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만의 명확한 선이 있습니다. ‘돈이란 무엇이다.’, ‘사업이란 무엇이다.’, ‘심리학이란 무엇이다.’, ‘철학이란 무엇이다.’ 등등. 특히 학자들일수록 엄격하고 세련된 말을 만들거나 정리해서 선을 긋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어놓은 선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 선이 명확하고 실용적이고 세련될수록 더 큰 명예나 부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세련된 선을 보고 듣기 위해 돈을 내고서라도 기꺼이 찾아갑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억만장자 워렌 버핏의 투자 철학 강의’

‘한 달 10kg 감량을 약속하는 1 대 1 다이어트’

‘만년 꼴찌도 천재로 만드는 기적의 독서법’


블로그 썸네일_복사본-001.png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l 인간이 그은 선도, 인간도 없던 시절


13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빅뱅이었습니다. 한 점에서 우주만물이 탄생했고, 모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하며 수많은 현상이 일어났다 사라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구가 탄생했고, 지구 안에 생명체가 탄생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시간과 공간마저 빅뱅과 함께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빅뱅 이후에도 한참 동안 지구는 없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 또한 없었습니다. 하물며 빅뱅 이후에도 그러한데, 빅뱅 이전에는 지구도, 생명체도, 인간도, 인간이 그은 선도 없었겠지요. 심지어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빅뱅 이전에는 시공간조차 없었다는 건데, 그럼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저 공허했다는 걸까요?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까요? 아무것도 없는데 태어난 빅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요?


노자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허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천 년이든 만 년이든 사물이 사라지면 허는 즉시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허를 눈곱만큼도 움켜쥘 수도, 밀어낼 수도, 할퀼 수도 없다. 어떤 총과 칼, 어떤 강력한 폭탄도 허를 상처 내지 못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 어떤 무엇도 허를 손상시킬 수는 없다. 요컨대, 허는 ‘파괴’될 수 없다. 왜냐하면 허는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91


노자의 말을 빌리면, ‘허’에서 빅뱅이 탄생했습니다. ‘허’는 창조된 것이 아니어서 파괴될 수도 없고, 그렇기에 태초에 존재하던 무언가입니다. 천지만물은 빅뱅의 순간 허에서 비롯되었고, 달리 말하면 허가 천지만물을 낳고 길렀습니다.


허는 물질이 아니다. 허는 물질이 아니면서 모든 물질을 제 품 안에서 기른다. 허는 존재가 아니다. 허는 존재가 아니면서 모든 존재들을 제 품 안에서 기른다. 허는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없고,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있다. 허는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다. 허는 존재가 아니다. 허는 비존재이다. 허는 창조된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반대로 허에서 모든 천지만물이 창조된다. 허가 모든 우주만물을 낳고 기른다. 요컨대, 허가 천지의 근원인 것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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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아름다움이란 선을 긋자 추함이 태어났다


저의 아들 담박이가 태어난 지 어느새 18개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담박이는 작디작은 손가락으로 세상 만물을 가리키며 소리칩니다.


“이거?! 이거?!”


그때마다 저는 개구리, 유아차, 불빛, 햇빛, 그릇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바쁩니다. 늦게 알려주거나 다른 일을 하느라 놓치면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는 게 영낙없이 저의 꼬락서니를 닮았습니다.


담박이에게 이런저런 이름을 알려주다가 굉장한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것도 그릇, 저것도 그릇, 그것도 그릇. 그릇, 그릇, 그릇.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재질도 다르고, 무게도 다른데, 다 똑같이 그릇? 저 다양함을 그릇이란 이름으로 퉁 쳐도 되는 걸까?’


무언가 크게 잘못된 거 같은데, 딱히 도리가 없어 저는 그저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릇~, 이 것도 그릇, 저 것도 그릇, 그것도 그릇~ 그, 릇.”


사람들은 소통하기 위해 온갖 것에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더니 나중에는 감정, 생각, 가치라는 것들에도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없던 선들이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자 비로소 추함이 생겨났고, 선을 만들어내자 비로소 악이 생겨났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되고, 심지어 그 둘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허는 천지만물을 만들었고, 천지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이름은 사물의 한 모습을 드러내었고, 동시에 사물의 다른 모습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그릇’이라는 이름은 음식이나 물건을 담는 기능을 드러낸 반면, 동시에 모양, 크기, 색깔, 재질, 무게 등 다른 모든 것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어느 지점까지는 언어가 도움이 되고 유익하지만, 어느 지점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언어가 오히려 심각한 장해물이 된다. 그 언어로써 지칭하는 바의 사물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그때부터는 언어를 내려놓고 직접 실재를 대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언어를 내려놓지 못하고 오히려 그 언어에 집착하고 그 언어를 신성시하여 그 언어 주변을 온갖 꽃과 향으로 장식하려 한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23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름을 붙였고, 이름은 점차 점차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이데올로기’를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종교와 정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옳음이란 선을 그었고, 사람들은 그 경계 안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 정치를 믿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추함과 악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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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원래 아무 선도 없었다.


‘허’에는 아무런 선이 없었습니다. 천지만물에는 본디 경계가 없었습니다. 천지만물은 근원적으로 하나이기에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천지만물은 둘로 셋으로 넷으로 쪼개졌고, 수없이 많은 경계가 생겼습니다. 천지만물은 본디 모습을 잃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을 위해 천지만물을 조작하였습니다.


아들이라는 경계, 학생이라는 경계, 교사라는 경계, 남편이라는 경계, 아빠라는 경계로 ‘저’라는 존재가 수없이 쪼개집니다. 본디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게 하려는 듯.


나는 인간의 책을 읽다가 놀란 적이 두어 번 있는데, 하나는 붓다의 ⟪반야심경⟫을 읽다가 ‘오온개공’이란 구절을 보았을 때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 ⟪도덕경⟫ 제25장의 이 구절을 보았을 때였다. ⟪반야심경⟫의 ‘오온개공’에서 나는 비로소 인간의 자아니 영혼이니 하는 것이 허구라는 것을 깨달았고, ⟪도덕경⟫의 이 구절 ‘부지기명’에서 나는 비로소 이름 붙여진 신은 참다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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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나를 내려놓으세요. 무위


노자가 추구하는 삶은 간단합니다. 본디 비어있고 온전한 상태, 무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주의 천지만물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노자는 인위니 작위니 하는 것을 걷어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노자의 무위란 행위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현상계에서는 행위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없는 것은 무엇이냐? 행위자입니다. ‘행위자 없는 행위’ 그것이 무위라고 합니다.


이때 행위자는 자아(ego)를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행위자 없는 행위’란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미와 추, 장과 단,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자아가 없는 행위를 뜻합니다. 욕심에 가득 찬 자아가 없는 행위,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하는 자아가 없는 행위.


따라서 노자는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걸 강조합니다.


거울은 원래 텅 빈 것이다. 텅 비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춰준다. 산이 오면 산을 비추고, 물이 오면 물을 비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우리의 마음은 때가 끼기 시작하여 사물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변형시켜 이상하게 비춘다. 산이 와도 물을 비추고, 물이 와도 산을 비추는 식이다. 산이 갔으면 다시 텅 비어야 하고, 물이 갔으면 다시 텅 비어야 하는데 텅 비는 힘을 상실하여 사물의 상이 뒤엉킨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125


허(비움)와 정(고요)에 이르기 위해 명상 수련을 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자에 따르면 명상이란 행위하려는 사람, 즉 자아(ego)가 쉬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허와 정에 이를 수 있을까요? 특별한 명상법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은 다 행할 수 있지만, 웬일인지 허와 정 이 두 가지만은 행할 수 없다. 차라리 채우라면 가득 채울 수 있고, 움직이라면 하루 종일 움직일 수 있는데 도무지 비움(허)과 고요(정) 만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185


무언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와 더불어 살고 죽는다. ‘어떻게’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온전히 휴식할 수 없다. ‘어떻게’를 묻는 그 사람이 사라진 것, 그것이 참다운 명상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120


“무위에 이르려면 자아가 없어져야 한다.”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자아를 없앨 수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어떻게'라는 생각을 하는 그 자아가 사라져야 한다.”라니……


노자의 무위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알듯 말듯한 오묘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오묘한 말에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이 충격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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