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을 읽고난 감상문입니다.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도덕경⟫을 ‘차경남’ 님의 관점으로 해설한 책입니다. ‘차경남’ 님은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는지, 다른 동서양 철학가들과 노자의 ⟪도덕경⟫을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노자의 철학 사상이 얼마나 독특하고 탁월한 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차경남 님은 노자의 ⟪도덕경⟫을 용광로에 넣고 끓이면 결국 ‘무위’라는 두 글자가 남게 될 거라 말합니다. 즉 ⟪도덕경⟫의 핵심을 ‘무위’라고 요약합니다. ‘무위란 행위자 없는 행위’를 뜻하는데 이게 참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입니다.
이 책은 어느 누구보다 제 자신(!!!)에게 강력 추천하는 책입니다. 세상에 감사해야 함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저에게.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옳음을 요구했던 저에게. 늘 고민과 잡념에 빠져 불안에 떨었던 저에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던 저에게. 비로소 노자를 만났고, 이제는 저에게 ‘무위’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위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늘 행위의 세계 속에서 삽니다. 잠에서 깨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놀고, 자는 등 인간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행위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행위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가 어떤 때는 유위이고 어떤 때는 무위입니다. 즉 한 가지 기준에 의해 행위를 유위와 무위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행위자의 유무’입니다. 그러니까 노자는 행위자가 있는 행위는 유위, 행위자가 없는 행위는 무위라고 구분합니다.
유위란 ‘행위자가 있는 행위’입니다. 이때 '행위자'란 ‘분별하는 자아’이고, 즉 유위란 ‘분별하는 자아가 있는 행위’라고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풀어서 설명드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옳고 그름,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고 그중에서 옳고 좋고 행복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갖가지 일에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을 분별합니다. 나아가 옳음, 좋음, 행복을 욕망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욕망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즉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에 끌려 다닙니다.
예를 들어 마약, 술, 도박 등에 중독된 행위는 모두 유위입니다. 순간적인 쾌락, 욕망에 끌려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공자의 ‘인’ 사상도 유위라고 지적합니다. 노자는 말없이 무위자연의 도를 따르는 사람인 반면, 공자는 자꾸 남 앞에 나서서 인을 부르짖고 또 인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즉 공자는 인이야말로 ‘옳음’이라 여겼고, 그 옳음이란 뜻을 펼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도 유위 수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모범생에 가까웠습니다. 어른들의 말도 잘 듣고 늘 옳고 바르게 행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가까운 사람에게 옳고 바름을 강요하는 편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하되 저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는 친절하다가도 ‘너도 옳고 바르게 행위해야지!’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친구들과 감정은 상하고 사이는 멀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옳음으로 주변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철저히 ‘유위’였습니다.
유위와 반대로 ‘행위자가 없는 행위’, ‘분별하는 자아가 없는 행위’가 무위입니다. 무위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 행복과 불행을 분별하지 않기에 어떠한 옳음이나 좋음이나 행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지자연의 도를 품은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도상(道常)
무위이 무불위(無爲而 無不爲)
도는 항상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함이 없도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334
천지자연에는 우리 인간들과 달리 목적이나 의도가 없습니다. 따라서 천지자연의 도는 무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천지자연은 하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즉 무불위입니다.
봄이 되면 냇물이 흐르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합니다. 봄이 지나면 순리대로 여름이 되어 만물이 저절로 무성해집니다. 나아가 가을이 되어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겨울이 되면 모든 생명이 뿌리로 돌아가 휴식합니다. 천지자연은 수없이 많은 생명을 낳아 기르고 거둡니다.
천지자연은 지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습니다. 누가 시킨다고 천지자연이 누군가의 목적이나 의도를 들어주지도 않고, 누가 시키지 않는다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천지자연은 세상에 이익을 줄 뿐 결코 해를 끼치는 일이 없고, 동시에 남을 위하고 도와줄 뿐 결코 다투거나 싸우지도 않습니다.
노자는 ‘무위이 무불위(無爲而 無不爲)’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으로 ‘물’을 소개합니다.
물은 그저 흐릅니다. 어떤 목적이나 의도도 없이 순리대로 흐릅니다. 물은 아무리 크고 거대한 바위를 만나도 피해 갈 뿐 물러서지 않습니다.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면 바위는 뚫려있고, 길은 물의 흐름에 맞춰 변해있습니다. 물은 세상을 탓하지도 않고, 세상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세상은 물의 흐름대로 바뀌어 있습니다.
물은 자기 고집을 내세우지 않는다. 물은 그릇이 둥그러면 둥그런 데 따르고, 그릇이 네모지면 네모진 데 따른다. 자기는 각이 딱 서 있는 네모진 것을 좋아하는데 왜 둥그런 그릇에 자기를 옮겨 붓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네모진 그릇 속에 20년 동안 있다가도 둥그런 그릇을 만나면 어떤 불평도 없이 즉시 둥근 것에 따른다. (중략) 물은 자기 앞의 생을 있는 그대로 100퍼센트 받아들인다. 물은 세상이 자기에게 맞지 않다고 거부하지 않는다. 물은 어떤 형태의 그릇이 됐건 그릇을 앞에 두고 고민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며, 어떤 선택이나 조작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요컨대, 물은 무위 그 자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592-593
저는 어렸을 때 '절대적으로 옳고 바른 길'이 있다고 교육받았고, 그렇게 자랐습니다. 시키는 대로 살았고, 시키는 것이 옳고 바름이라고 여겼고, 그 옳고 바름을 주변에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옳고 바른 가치를 가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하며 옳고 바름을 가르쳤으나, 정작 제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옳고 바름이 저의 가치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옳고 바름도 다 누군가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은 없다.
올바른 것이 변하여 요상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되나니,
인류가 이 진리를 잃어버림이 실로 오래되었구나
그러므로 성인은 반듯하되 남을 해치지 아니하고
청렴하되 남을 깎아내리지 아니하며
곧지만 교만치 아니하고
빛나지만 번쩍거리지 않는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479
군대 훈련병 시절이었습니다. 훈련 기간 중 틈틈이 ‘교육 시간’이 있었습니다. 장교들은 교육 시간 내내 ‘우리의 주적은 북한!’을 강조했습니다. 왜 북한군을 경계해야 하는지, 왜 북한군이 적이자 악인지, 왜 북한군에게 총을 겨누어야 하는지, 왜 북한군을 죽여야 하는지를 열심히 역설했습니다.
문득 질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북한에 태어나서 북한군에 입대했어도 북한이 악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북한군에게 총을 겨누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내가 남한에 태어났기 때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건 아닐까? 남한에 태어난 이유가 북한군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게 합당한가?
결국 저는 남한과 북한의 지배 세력 간의 힘싸움, 나아가 국제 세력 간의 힘싸움에 사용되는 장기말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노자는 이미 2,500년도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던 듯합니다. 작은 유위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폭력이 된다는 걸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유위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절대적인 세계가 아니라 상대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인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이런 인지적 오류를 보완하기 위해 고대 동양의 현자들이 고안해 낸 방식이 ‘음양론적 사유’라고 합니다. 천지자연의 도는 수백수천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양 극단의 음과 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세상만물은 봄에 깨어나 여름에 무성해지지만, 가을이 되면 생장을 멈추고 겨울이 되면 땅속으로 돌아갑니다. 천지자연에는 영원한 성장이나 영원한 죽음이 없습니다. 즉 무언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쪽 극으로 되돌아간다는 겁니다.
‘상대성을 절대성으로 착각하는 우리’에게 노자는 반대극을 염두하라고 조언하는 듯합니다. 어떤 무언가를 행하려고 할 때 잠깐 멈추어 음양의 양극단을 보라고 말입니다. 양 극단을 살펴야 비로소 사물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흥망성쇠라는 말처럼 흥이 있으면 반드시 망이 있고, 성이 있으면 반드시 쇠가 있을 테니까요.
시대의 리더들은 ‘장기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짧게는 몇 년 뒤를, 길게는 다음 세대와 시대를 내다보는 안목을 지녔습니다. 리더들은 그 안목으로 돈과 명예를 손에 쥡니다.
그런데 노자는 '장기적인 관점'을 넘어 ‘초장기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듯합니다. 노자는 고작 다음 세대나 시대를 내다보는 게 아닙니다. 노자는 짧게는 자신의 생 이후, 길게는 천지자연의 순환, 나아가 우주의 질서까지 들여다봅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다 해도 결국 ‘아침에 잠깐 났다 시드는 버섯’이요, ‘여름 한 철 사는 메뚜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주 저편에 있는 저녁과 새벽을 알 수 없고, 봄과 가을을 알 수 없다. 노자가 말한 ‘성인’이란 바로 이런 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415
우리는 지금 이 삶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고 유위의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유위의 집 안에는 돈과 명예 그리고 지위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가 돈과 명예 그리고 지위를 누리며 살고,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누군가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누군가는 좌절에 그치지 않고 그 집을 파괴하려 합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그 집이 파괴되어도 우리는 새로운 유위의 집을 짓습니다.
천지자연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불행의 집을 짓는 존재일 겁니다. 소중한 생을 주었건만 그 짧은 생을 온갖 유위로 낭비하는 존재.
‘생生’과 ‘작作’은 어떻게 다른가?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있는 것을 낳을 때 그것을 ‘생’이라 하고,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없는 것을 낳을 때 그것을 ‘작’이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이 ‘생’이고, 사람이 책상이나 의자를 만드는 것이 ‘작’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것이 ‘생’이고, 공장에서 기계가 물건을 낳는 것이 ‘작’이다.
차경남, ⟪노자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글라이더, 2018, p.372
천지자연이 만든 무위의 세계가 ‘생’이라면, 인간이 만든 유위의 세계를 ‘작’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억지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생명을 낳아 기르고 거두는 생생한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본래 없지만 만들어낸 작위적인 세계입니다.
천지자연의 도를 품은 생생한 세계는 지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며 늘 순리대로 흘러갑니다. 반면 유위를 품은 작위적인 세계는 지치고 답답한 일이 가득하며 끝없이 다툽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세계는 둘 중 어디에 가까울까요? 아쉽지만 제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작위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지칠 때가 많았습니다. 쉬는 날이면 부족한 휴식을 보충해야만 했고, 끝없이 노력하고 끝없이 쟁취해야 했습니다.
끝내 교사라는 지위를 쟁취했지만 이곳 또한 작위적인 세계입니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 거는 하지 말아라. 저 거도 하지 말아라.’라고 요구합니다. 보호자들도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거는 왜 하는 거예요? 저거는 왜 하는 거예요?’라며 묻고 요구합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점차 생생한 세계에서 작위적인 세계로 발을 들입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왜 지치고 답답한가 궁금했는데, 작위적인 세계였기 때문인가 봅니다. 유위와 유위가 부딪치고, 그 사이에 무위가 유위가 되는 세계였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리고 저를 돌아봅니다. 나는 왜 교사로서 삶이 때때로 지치고 답답했는가? 그것은 제가 ‘작’을 추구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생’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게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작’하려고 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생’은 지치지도 쉬지도 않는 생생한 세계, ‘작’은 늘 지침과 답답함에 가득 찬 작위적인 세계. 이제부터라도 작위적인 세계를 내려놓고 생생한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