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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이 Jun 07. 2019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북라이프, 2015

김민철 작가 강연이 있어서 급하게 읽었다. 결론은, 여태까지 읽은  '여성작가의 에세이' 중에서 최고. 2015년에 나온 책인데 왜 빨리 읽지 못했나, 정말 아쉽다.


책과 여행, 취미 등을 말하면서 참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분야를 말하기도 한다. 심각하지 않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글들. 유쾌하게 살고 말하는 저자의 태도가 정말 좋다.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나는 기억난다


책 읽기에 관한 문장. 저자는 정말 뒤돌면 까먹을 정도로 워낙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도 기억력이 좋지 않아 책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의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또 책이 풍기는 분위기와 거기서 나오는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기억할 뿐이다. 저자의 문장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유였다.



저자 부부의 취미는 맥주병뚜껑 모으기란다. 병뚜껑 따위,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쓰잘데기없는 물건이다. 그런데 외국 지폐와 우표를 수집했던 시아버지의 반응이 정말 재밌다.


하루는 시부모님이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가 수천 개의 병뚜껑을 보셨다. 너까지 이런 걸 모으는 거냐, 라며 지긋지긋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등 뒤에서 시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한마디를 남기셨다.
“병뚜껑은 모을 만하지.”


시아버지의 흐뭇한 표정과 시어머니의 어이없는 표정, 그리고 저자 부부의 뿌듯한 표정까지 눈앞에 그려진다. 이렇게 재밌는 장면이 지나가고 저자는 맥주병뚜껑 모으기에 새로운 의미부여를 한다. 그들은 그냥, 재미있으니까 모으는 거다. 아무것도 아닌 맥주 코너가 그들에게 보물상자가 되고 둘만의 기쁨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태도.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의 끊을 놓지 않은 채로 항상 깨어 있는 삶의 태도. 그의 말이 퍽 반갑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가 그 사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가 그 편지를 본다면 연애편지로 읽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친구에게 보내는 일상적인 편지처럼 읽히도록 쓰시오.


저자가 카피라이팅 세계에 들어오면서 친 시험의 문제 중 하나다. 그는 모호한 감정을 어렴풋이 드러내게 요구하고, 심지어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문제여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안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흠, 나는 이 문제에 어떤 글을 써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요리보고 저리봐도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


마지막 5장은 쓰기를 다루는데, 앞선 글들과 감정이 다르다.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는다.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변한 감정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눈에 띄었다. 이 부분을 100% 공감하지는 못하지만(나는 글을 못 쓰고, 이만한 감정을 갖기에는 깜냥이 없으니까) 책과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책 읽기와 글쓰기의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읽다가 울었다니까.


어느 날 문득, 불안해졌다. 내게 그토록 익숙했던 밤의 문장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카피라이터가 되면서, 남편을 만나면서, 이전의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많이 달라져버린 것 같았다. 확실히 생각은 단순해졌다. 감정도 직선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한 발 빼고 남의 이야기로 흘려버리는 때가 많았다. 나는 괜찮으니까, 라고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감정의 끝이 많이 뭉툭해졌다. 문장 하나에 열광하는 일은 더 잦아졌지만, 문장 하나에 아파하고 끝없이 생각하고 우울해하고 결국 일기장을 꺼내는 일은 사라져버렸다. 속은 텅 비어갔지만, 사는 게 괜찮았으므로 나는 괜찮았다. 심각한 생각은 쓸데없는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도 자각도.
그러다 보니 나는 대충 괜찮아졌고, 그런 일들이 반복이 되자, 더 이상 괜찮지 않았다. 물론 하루라도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저 버티는 건 정말 사는 걸까’라는 노래 가사 한 줄을 며칠 동안 곱씹던 20대는 지금 내겐 너무 버거웠다. 누구의 20대가 안 그렇겠냐만은.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욕심이었다.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으면서 20대의 나를, 그때의 글쓰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불안했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불안함이었다.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종이책으로 한 권 들이고 우울해질 때마다 펴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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