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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이 Jun 13. 2019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직전에 읽은 박준 시인의 <당신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가 마음을 크게 울려서 호기롭게 편 시집이었지만... 너무 어렵드아. 박준은 뭔가 말랑말랑한 감성을 건드려서 편했는데 허수경은 이전에 학교에서 배운 '시'의 이미지에 아주 부합하는 글이었다.


감정의 층위가 박준보다 조금 더 깊고 무거웠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읽다보면 아, 문장 하나하나가 내가 소화하기 힘든 감정을 싣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에 들기 전 침대에서 누워 읽다가 어느새 앉아서 각잡고 읽게 되는, 그런 글이었다니까. 그러니 다음 시집은 가벼운 걸로 골라야겠다.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렜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 걸었습니다
저녁을 말아먹고 검어지는 수제비마당에
대야를 내놓고 발을 담급니다


걷다가 아주 많은 발을 보았습니다
말, 양과 돼지 오리와 토끼의 발 자전거 자동차의 발도
빌딩이라는 황무지를 걷다가
김밥을 넘기며 잠시 멈춘 발도


지금쯤 그들의 발도 퉁퉁 불어 있을 겁니다
모두들 걷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
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
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


여름길 걷느라 지쳐서 낡은 구두는
늙은 소처럼 어둠 속에 웅크립니다
앞으로 걸으려던 발자국들이 미숙한 아이로 남은이 저녁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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