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첫 시집을 읽고나니 편협한 독자인 나는 그의 시에 '미녀', '한때의 사랑', '사별'의 이미지를 잔뜩 덧씌웠다. 그래서 이런 시가 아니면 이게 뭐야, 하는 식으로 휙 넘겨버리는 셈이다. 시인에게 동어반복을 요구하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지루해하는 아이러니. 나는 나쁜 독자다.
헌데 확실히 이전보다 울림을 주는 시가 좀 줄었다. 시를 해석하려고 들어서일까?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는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_9쪽
한밤
울면서
우사 밖으로 나온 소들은
이곳에 묻혔습니다
냉이는 꽃 피면 끝이라고
서둘러 캐는 이곳 사람들도
여기만큼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냉이꽃이 소복을 입은 듯
희고
머지않아 자운영들이 와서
향을 피울 것입니다
_20쪽
까닭없는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에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_34쪽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 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_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