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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이 Sep 12. 2019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1. 카피라이터 김하나와 에디터 황선우가 함께 살면서 겪은 여러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쓴 에세이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다툼과 논쟁과 삐짐과 화해가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말한다. 책을 읽다보면 혼자 살기, 함께 살기,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2. 여전히 나는 혼자 먹는 밥이 맛있고 혼자 하는 여행의 간편한 기동력을 사랑한다. 그런 한편으로 또 믿게 되었다. 혼자 하는 모든 일은 기억이지만 같이 할 때는 추억이 된다는 이야기를. 감탄도 투덜거림도, 내적 독백으로 삼킬 만큼 삼켜본 뒤에는 입 밖에 내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_18쪽


3. 내 취향에는 김하나의 글이 더 재밌다. 황선우는 뭔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제를 고발할 듯한 글을 쓴다면, 김하나는 문자 그대로 통통 튀는 탱탱볼 같은 느낌의 글을 써내려간다. 책에서 뇌리에 남는 에피소드를 딱 하나 고르라면, 김하나가 황선우의 집을 청소하는 '집요정 도비의 탄생' 장이다. 이 부분만큼은 정말 깔깔대며 읽었다. 더럽다는 묘사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좀 길지만,


냉장고를 열면 항상 물건이 우수수 떨어졌다. 요즘 욜로(YOLO)라는 말들을 하는데, 황선우의 냉장고를 열어보면 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진짜 순혈 욜로다. 다음에 냉장고를 열 스스로를 배려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인생은 짧고, 당신은 인생을 단 한 번 살 뿐이다. 문을 열고, 우유와 햄 사이에 2.5cm 정도의 틈이 보이면 맥주캔을 그 틈에 어떻게든 욱여넣고, 서둘러 문을 닫는다. 그러니 열 때마다 제대로 자리를 못 잡은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그건 그냥 냉장고를 열 때마다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의식 같은 것이었다. 허락을 받고 냉장고를 정리하자 저 안쪽에서 고급 브랜드의 리미티드 에디션 초콜릿이 한 상자 나왔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반색했지만 유통기한이 3년 정도 지나 있었다. 냉장고 얘기만으로도 이 글의 반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냥 채소통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미끌미끌하고 거무죽죽한, 거대하고 신비로운 굴을 꺼내 버리는 것으로 냉장고 청소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라고만 해두자. 그 굴은 언제 욜로의 성전에 들어가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양배추였다... (105쪽)


이 문단은 정말 무릎을 탁 치면서 읽었다니까.


4. 법이 정한 '정상 범주'의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를 가진 이들은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의 범위도 좁은 편이란다.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범주에 들면서 생활동반자법의 도입에 많이들 찬성하지만, 실질적으로 동반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참 의견이 엇갈렸다. 현실적인 문제가 되니 함부로 말할 수가 없구나. 이래서 입으로만 떠드는 나같은 인간은 몹쓸 놈이 되는 거야.


5.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이라는 단단한 구속으로 서로를 묶는 결정을 내리는 건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한 삶의 생애 주기에서 어떤 시절에 서로를 보살피며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따뜻한 일 아닌가. 개인이 서로에게 기꺼이 그런 복지가 되려 한다면, 법과 제도가 거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다채로운 가족들이 더 튼튼하고 건강해질 때, 그 집합체인 사회에도 행복의 총합이 늘어날 것이다.  _271쪽


6. 재밌게는 읽었는데, 혼자 사는 것도 좋고 여럿이 사는 것도 좋은데, 그래서 앞으로 미래의 변화될 가족 형태에 맞춰 법과 제도를 바꾸고 서로의 편견을 깨는 것도 좋은데, 이 책을 다시 읽으라면 글쎄요, 딱히. 재치와 위트도 잠시 뿐이었다. 뭐, 그래도 생활동반자법이라든가 변화하는 가족의 형태에 대해 한번이라도 환기하고 곱씹게 만들어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임은 다 한 것 아닐까 싶다. 작가들도 뭐 거창한 주장을 하려고 책을 쓴 건 아닐테고 말이다.


7. 그나저나 망원동 아파트를 사기 위한 대출금을 2년만에 갚아버린 작가님들 존경합니다. 진심입니다. 역시 회사를 열심히 다니려면 대출로 돈 좀 땡겨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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