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일하게 전작을 읽은 작가인데 이상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실망하게 되는 작가, 김영하. 직전에 읽은 소설 <빛의 제국>을 구시대적이고 뻔한 소설이라 평할 정도였다. 그래도 산문 삼부작 중 <보다>는 나름 재밌게 읽어서(비록 씨네21에 연재된 글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웠지만) 이번 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꽤나 기대했다. 게다가 ‘알쓸신잡’에서 보여준 여행을 대하는 태도는 기대감을 더 크게 해주었다.
2. 여행 에세이 붐을 부른 책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김병률 시인의 <끌림>이다. 여행지에서 느낀 감정을 호들갑 떨지 않고 시인답게 차분하고 단정하게 읊조린다. 직업과 일을 대하는 태도과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요즘, 여행 에세이의 유행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있었던 온갖 일을 유쾌하게 풀어놓으며 방구석에서 온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을 들게 해 준다니까.
3. 그런 면에서 <여행의 이유>는 여타 여행 에세이와는 완전히 다른 책이다. 이전의 에세이들은 일상에서 벗어난 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풀어놓고 거기에서 얻은 약간의 사유를 말했다. 반면 <여행의 이유>는 작가 본인의 여행 이야기보다 여행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 새로운 경험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내용으로 차 있다.
4.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_65쪽,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재인용
여행을 떠나서 숙소의 새하얀 침구류를 보면 마음에 위안을 받는다. 깔끔하고 새로운 것에서 안정감을 받기도 하겠지만, 일상과 완전히 분리된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남으로써 일상에서 분리되는 게 아니라, 온갖 상처와 슬픔, 회한이 가득 투영된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다소 전도적인 상상을 해볼 수 있다.
5. 여행의 본질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작가는 ‘알쓸신잡’에서의 경험을 말한다. 여행지에서 돌아다닌 건 자신과 다른 출연자지만 총체적으로 여행을 한 사람은 결국 시청자다. 방송 출연자 각자는 자신이 경험한 일만 기억하지만, 일관된 맥락으로 편집된 방송을 본 시청자가 온전한 여행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믿을만한 정보원을 통해 여행을 대신하는 탈여행이다. 비경험의 대가(?) 피에르 바야르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속에 타자의 관점을 지니는 것, 그 대상이 장소일 경우 그것은 전통적으로 여행과 결합된 경험 - 전능의 환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 에 대립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 경험을 우리는 탈여행이라 명명할 수 있을 터. _ 114쪽,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재인용
작가는 여행은 여행자 본인의 경험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타인의 경험담과 온갖 정보를 통해서 하나의 맥락으로 갖춰지는 법인 셈이다. 온갖 정보가 넘치는 세상에서 여행 정보서와 에세이가 아직 사라지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여행 에세이를 또 내고 싶다는 욕심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농담)
6.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에게 관종짓하는 내용과 여행자의 자기 정체성을 연결 짓는 부분은 꽤나 감탄했다. <보다>처럼 재치 넘치는 크로스오버였다. 하지만 책의 모든 핵심 메시지들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다. 작가가 말빨이 좋아도 조금 식상한 편이다. 물론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야만 좋은 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고루함을 깰만한 번뜩임이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여행의 이유>에는 이 번뜩임 보이지 않았다. 200쪽 중에 갈무리할만한 문장이 한 줄도 없다는 것이 방증이다.
7. 만약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비행기를 타고 사진을 찍던 경험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소 자기 계발스럽고 뻔한 메시지지만, 일상에서 소소한 일을 발견하고 나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8. 오랜만에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희한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