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멸망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헨리동물원, 마트에 나뉘어 살고, 불모지엔 불쑥 드래곤과 요정, 캇파, 간다르바와 같은 환상종들이 등장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판타지 등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시작부터 두근두근 설렐만하다. 심지어 작가는 그 유명한 <드래곤 라자>의 이영도가 아닌가. 사실 <드래곤 라자>는 너무 예전에 읽어서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오히려 최근에 단행본으로 나온 작가의 <오버 더 초이스> <오버 더 호라이즌>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하얀 늑대들> 다음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장르 문학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환상종은 세계가 멸망할 때 나타났다. 드래곤 헨리가 헨리동물원을 지키고(?), 마트에는 인간종의 부흥(혹은 부활)을 꿈꾸는 마트퀸이 있다. 주인공은 사랑과 번식을 증오하는 시하,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록하기 위해 행동하는 칸타다. 기록자인 칸타는 인류의 마지막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마트로 향하지만 환상종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다. '번식'을 증오하고 '인류 자살'에 앞장서던 시하는, 남몰래 흠모하던 칸타를 구하기 위해 요정과 모험을 한다.
억울하고 분하고 비참했다. 다 싫었다. 쥐틀에 요정이 걸린 것도. 마녀레인지에서 언제나 똑같은 샌드위치가 나오는 것도. 그걸 먹을 때마다 파리가 된 기분이 드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손이 아픈 것도. 인류가 망한 것도. _55쪽
"언제 출발할 거야?" "내일 해 뜨기 전에." "내일?" "눈 오는 거 보고 결정했어. 다음번에 눈 오면 진짜 못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시하는 칸타를 똑바로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해 남아 있을 때 수염이나 깎자." _73~74쪽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은 사실 흔하다. 그러나 환경 문제, 인류 자살, 마트퀸의 캐릭터성, 환상종 등 다양한 장치들이 이영도식 유머와 엮여 빛을 낸다. 대체로 '환상'을 다룬 문학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지만, '세계관의 이해'라는 진입장벽이 난관으로 작용하곤 한다. 톨킨의 소설이 그러했고,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 또한 그러했다. 독자가 온전히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세계관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취향을 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시하와 칸타의 장>은 분량이 짧다 보니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곱씹으며(공부하며) 읽다 보면 흥미로운 부분도 많다. 다행히 요정 데르긴이 해설자의 역할을 해주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이건 근데 이영도 작가의 글에 늘 등장하는 장치 같다. 언젠가는 언변가 캐릭터 없이도 술술 잘 이해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다). 마트퀸의 의견에 의하면 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 암송'과 '시 문답'은 인간 부흥의 핵심이다. 문학 없이는 인류의 존속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나는 참 헷갈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인류의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온전한 환경의 소중함? 핵전쟁을 하지 말자? 문학의 중요성? 작품 해설에서 이융희 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의의는 우리가 익숙하게 즐기는 환상 그 자체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 더 진지하게 모색해보고자 제언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였다."
시하가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 대목은 명쾌하면서도 찝찝하다. 이영도 작가는 엔딩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총평을 하자면 <시하와 칸타의 장>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는 부분도 있고 닮은 부분도 있는, 현학적인 판타지 소설이었다. 결말 부분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 건 아쉽지만, 취향이 잘 맞다면 몇 번이고 다시 볼 만하다.
"난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칸타의 어깨에 앉아 시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데르긴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잠깐만! 어디보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_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