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추억하는 방법

백암재단 기부•나눔활동 사례 공모전 장려상

by 책읽는 조종사

당신을 추억하는 방법

딱 두 번째 고비였다. 할아버지가 생을 달리한 건. 할아버지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육 남매와 열두 손주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시곤, 평생을 함께한 할머니의 손을 조용히 놓으셨다. 여든. 길다면 길고 100세 시대엔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연세로 작고하셨다.

할아버지께 찾아온 첫 번째 고비는 암이었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찾아온 암이었던지라 가족 모두에게 경계 발령이 내려졌다. 불침번을 서듯 할아버지 곁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지켰다. 다행히도 5년 후 검사 결과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전이는 없었다. 모두가 바란 긍정적인 결과였다. 완치된 할아버지는 여의도 공원에서 미군 항공기 해설사로 일을 하셨다. 누구보다 멋진 노년을 보내셨다.

대학 진학을 계기로 상경한 나는, 외조부모님댁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할아버지댁에서 살았던 3년의 하숙 생활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할아버지는 손수 시장에서 통닭을 두 손 가득 사 오셨다. 소금에 찍어 먹는 프라이드 통닭 맛은 일품이었다. 내 친구들까지도 손주처럼 대해주셨다. 자식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신 할아버지는 이젠 손주에게 내리사랑을 베풀고 계셨다.

마냥 건강하셨던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두 번째 고비를 맞으셨다. 예기치 못한 뇌출혈로 혼수상태가 되셨고, 사경을 헤매셨다.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인해 수혈이 필요했으나 피가 부족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해왔던 헌혈을 해왔지만, 모은 헌혈증은 기껏 해봤자 몇 장 되지도 않았거나 이미 잃어버린 후였다. 다급한 마음에 대학 과사무실 조교님께 부탁을 드렸다. SNS에 소식이 뿌려졌고 헌혈증이 하나, 둘 모이더니 어느새 30장 가까이 모였다. 조교님을 통해 건네받은 헌혈증 한 묶음을 손에 쥐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음 써준 선후배와 교수님들께 감사해서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잰걸음으로 병원에 다다라선 헌혈증 한 묶음을 삼촌에게 건넸다. 이날 삼촌이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육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삼촌은, 아버지의 짐을 이어받아 어깨에 이고 있었다. 유일한 남자라는 이유로 강인한 모습만을 보였던 삼촌이었다. 얼마나 고되고 무거웠을까. 삼촌의 마음의 짐을 한 섬 덜어드린 기분이었다. 헌혈증 덕택에 할아버지는 몇 차례 수혈을 받을 수 있었다.

위기는 넘겼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 계셨다. 중환자실에서의 면회는 제한적이었다. 하루 2회, 1명의 보호자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전엔 할머니가, 저녁엔 큰이모가 만나 뵈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회를 기다리고 있는 육 남매와 열두 손자. 나에게도 차례가 올까 싶었다. 할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만나 뵙고 싶어 온 가족이 중환자실 앞에 서성거렸다. 면회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해도 규정상 하루에 두 번, 단 두 명만 면회가 가능하다는 답변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라도 면회객이 중환자에게 병균을 옮길까 봐 염려해서 면회를 제한하는 게 이해는 되면서도 서운한 감정은 물릴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할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빛 한 줄기가 마음속을 비추는 듯했다. 드디어, 곧 일반실로 옮길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까지도 들렸다. 수혈받은 효과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피에서 피로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다음 날, 일반실로 옮길 수도 있다던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밤 중에 호흡기가 빠져 상태가 위중해졌다는 소견만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볼 날이 다시 뒤로 밀렸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의식은 회복하였지만, 자가호흡이 되지 않아 호흡기를 내내 달고 계셨다. 중환자실에서 할아버지를 위한 조치는 연명밖에는 없었다. 중환자실에서 퇴원해 면회가 가능한 집과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자는 할머니와 육 남매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다.

할아버지는 호흡기를 단 채로 이송됐다. 집 근처 병원에서 비로소 할아버지는 온 가족과 마주할 수 있었다. 호흡기를 달고 있어 말을 할 순 없었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가시던 날, 두 손을 꼭 잡으시고 고개를 끄덕였던 할아버지. 괜찮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육 남매와 다섯 사위, 열두 손주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천천히 건넸다. 돌아가며 손을 꼭 잡아주시고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는 딱 일주일을 생의 문턱 끝자락에서 기다리셨다. 모두에게 짐이 되지 않게 투병 생활을 길게 하지 않으셨던 게 아닐까.

할아버지는 아직 오지 못한 손주까지도 기다리셨고,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곤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까지 할아버지는 신사셨다. 한 사람도 서운해하지 않게 묵묵히 기다리셨다. 생의 문턱 끝자락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비가 오면 자식들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어주던 신사는, 마지막 가시는 길엔 대형 파라솔을 펼쳐 드셨다. 지금도 할아버지가 펼치신 대형 파라솔 덕분에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보호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남은 헌혈증은 과사무실에 반납했다. 마음 써준 학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헌혈증을 꾸준히 기부하여 학우들을 돕는 문화가 정착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학과 SNS에 감사의 글을 올렸다. 그리하여 학과 내 헌혈 소모임인 Blood Donation(BD)이 결성되었다.

새 학기 개강과 동시에, 헌혈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다. 헌혈의 중요성과 피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값진 일인지 알리고 싶어 시작했다. 노란 조끼를 입고, 헌혈의 집에 찾아오는 분들께 밝게 인사하며 안내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여서 바쁜 시기였지만, 나를 숨 쉬게 해준 자원봉사였다. 헌혈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그 일은, 할아버지를 추억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졸업 후 곧바로 입대하여 잠시 중단한 헌혈은 공백기를 맞았다. 항공기 조종사로 근무를 했기에 헌혈을 할 수 없었다. 헌혈을 하고 나선 며칠간 비행에 제한이 걸려 긴 휴가가 아니고선 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6년이 지났고, 마침내 육아휴직을 하게 된 첫 주에 헌혈의 집을 방문했다. 휴직 후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게 헌혈이었다. 휴직이 끝나가는 지금도 헌혈을 이어가는 중이며, 삶의 일부가 되었다.

헌혈을 할 때마다 할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인사가 떠오른다. 손을 붙잡았을 때 전해진 그 온기가, 안아주셨을 때 나를 감싼 그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뇌출혈로 쓰러진 할아버지는 수혈을 통해 의식을 회복했다. 헌혈 덕분에, 생의 문턱 끝자락에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 진한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나에겐 헌혈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최선의 보답이기에 앞으로도 꾸준히 할 예정이다.

할아버지를 잊지 않고 평생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까. 할아버지와 나는 항공기를 사랑한다는 공통점을 품었다. 할아버지는 미군 항공기 해설사로 마지막 노년을 보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해 마침내 항공기 조종사가 되었다. 살아계셨더라면 무척이나 기뻐하셨을 텐데. 하늘에서 손주를 자랑스레 내려다볼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하늘을 날며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헌혈을 통해 그리운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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