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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Sep 05. 2020

65. “당신이 좋아하는 종이를 보여주십시오.”

종이의 신 이야기 / 오다이라 가즈에 / 책읽는수요일


65. “당신이 좋아하는 종이를 보여주십시오.”

종이의 신 이야기 / 오다이라 가즈에 / 책읽는수요일


200406 본문│ 배경을 안다는 것은 아마 단순히 아름다움의 비밀과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자세로 물건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마음가짐을 찾는 직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시작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종이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진 저자는 종이와 밀접하게 닿아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 듣고 기록했다. 종이와 관련 있는 일을 하는 혹은 종이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종이 관련 공간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처음 책을 마주했을 때 ‘우와 재밌겠다’ 했는데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못가 집중력이 떨어졌다. 책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확실치 않다. 그렇게 잠시 거리를 두었다가 ‘그래도 읽어봐야지 ‘ 하는 마음에 책을 다시 잡았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재밌긴 한데 번역이 이상한 건지 글 자체가 그런 건지 문장이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거나 술술 읽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내용과 기획을 비교했을 때 기획이 훨씬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기획 자체가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버전으로 이야기를 엮어도 충분히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누군가가 이와 같은 책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종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종이’에 대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느려 터진 전달 도구’라 이야기한다. ‘종이가 왜 느려 터졌지? 무슨 뜻이지?’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아참 종이는 느리지, 그러면서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지’하며 격한 끄덕임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종이에 집중하는 이유와 그 종이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활판 인쇄 결과물을 두고 ‘재미있는 인쇄물’이라 표현을 사용한다. 이 책에는 어색한 문장이 여럿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내 마음을 빼앗은 문장들이 수두룩 빽빽- 했다. 그런데 그러한 문장들이 어떠한 주장이나 생각을 담고 있기보다 무언가를 묘사하고 어떠한 사물을 두고 적합하고 멋지게 표현하고 있었다. 즉 표현법이 참 좋았다. 예를 들어 ‘케케묵은 것 같지도 않고 볼품이 없지도 않았다.’라든가 ‘종이에 남기는 장인의 흔적, 시간과 빛이 퇴적한 종이, 풀지 못하는 소포, 너무 깨끗한 우표는 피곤하다.’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러한 소제목이 참 좋았다. 신박하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아침 햇살이 조용히 세상을 밝히듯 내 마음에 따뜻한 조명을 켜는 듯한 기분이었다. 책에 나왔던 내용을 빌어 표현을 해보자면 이렇다. ‘그 하나하나는 아무것도 아닌 단어(소도구)에 불과했지만 그 조화가 세련되고 화사한 품위가 있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파피에라보에서 상품을 선정하는 기준은 팔릴지 안 팔릴지가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가’이고 ‘이것이 개점 당시부터 흔들림 없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내용이었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책으로 끌어 오자면 팔릴지 안 팔릴지가 아니라 출판사 혹은 저자와의 조화를 이루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차원의 문제다.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길 원하지만 여러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떠한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게 아니고 지금 그 브랜드를 가까이하는 고객들을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이야기는 내 머릿속을 맑게 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이든 브랜드든, 긍정이든 부정이든 인지도가 높은 것은 인지도가 낮은 것보다 높게 평가되어 그 무언가의 힘이 된다. 그러한 탓에 본질과 상관없이 일단 알리고 보자는 식의 마케팅이 판을 치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마주하자 당연한 것인데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목적, 나의 인지도를 높이는 목적이다. 보통은 무조건 많이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서 정말 별의별 짓을 다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모두에게 알려져야만 하는 것인지 100명에게만 알려져도 충분한 정보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한 것보다 진짜 친한 몇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가 재작년 언리미티드에디션에서 갔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언리미티드에디션은 서울아트북페어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 있는 독립출판축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는 나의 데일리 백인 프라이탁 가방을 들고 갔는데 축제장에 방문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했었다. 유행에 따라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이 태반인 경우를 종종 보았지만 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빈도에 비해 그곳에서 마주치는 빈도가 높았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독립출판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프라이탁을 많이 들고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가치의 공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독립출판을 만들고 읽는 사람들은 기성 출판물에서 벗어나 예외적인 것, 차별성을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럭에 짐을 싣고 비가 맞지 않도록 덮는 천인 ‘타폴린’이라는 방수천을 재단하여 만드는 프라이탁 가방은 비슷한 가방은 있어도 똑같은 가방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가치의 공통분모가 있다고 본다. 이 책에는 ‘활판 인쇄에 끌리는 사람은 그릇이나 옷의 소재에 관심이 높아 나아가서 생활양식에도 애착을 가진 사람과 교차가 되는구나’ 하는 내용이 있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가성비뿐만이 아닌 가치의 공유 혹은 연대가 중요한 소비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책공방 책에 대한 리뷰를 보았다. 부족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낸 내용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책으로만 판단했다.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의 여건상 그러한 결과물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자위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더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글을 보고 나니 내가 책을 읽고 쓰는 나를 위한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나의 부족함은 나의 부족함이고 나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나의 부족함은 앞으로 충실히 보완해 나가야 할 문제이고 나의 생각은 충실히 기록해야 하는 것이 맞다. ‘종이의 신 이야기’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종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종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종이가 있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의 표지는 한지 같은 질감의 종이를 사용했다.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내용과 형태의 조화는 좋은 디자인의 궁극적인 기준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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