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작인 동시에 끝인 삶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의 서신교환

by 이승희

< 친애하는 그대에게 >

시쓰는 임주아와 책만드는 이승희의 서신교환


17. 시작인 동시에 끝인 삶


이 책을 준비하며 지난 기록을 샅샅이 파헤쳤다. 좋은 감정은 좋은 대로 나쁜 감정은 나쁜 대로 꾸밈없이 적은 기록들을 살펴보며, 나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어떠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며 진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니 자연히 미래의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기록이 가진 힘일 것이다. 나는 책공방을 통해서 기록의 즐거움과 참맛을 깨달았다. 기록을 실천하며 그 과정에서 기록의 힘을 경험했다.

- 이승희의 『책공방, 삼례의 기록』 서문 중에서



주아님 지난번 보내준 시가 참 좋았습니다.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순간과 여러 감정들 모두 하나같이 언젠가 저 또한 겪어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과 순간이 우리를 스쳐지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탓에 작년 인생보 프로젝트 주제어를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로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가 쓰는 이 편지 또한 나와 우리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로 소원해지거나 멀어지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이와 같은 기록이 없으면 사라진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지금의 이 기록이 있으므로 아마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 기록을 통해 지금의 우리가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봐라물왕멀296 연재 채널 소식은 잘 보고 있습니다. 일곱 사람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특히 ‘밤의 붉은 빛’이라는 제목은 사실적이며 시적이라 좋습니다.


몰라서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너무 잘 알아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잘 모르면 오히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인데 너무 잘 알기에 그 사안에 얽혀 있는 다양한 요인들을 다 알기에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을 때가 갈수록 많아집니다. 그래서 많은 일들에 종종 화가 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킬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주아님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사람들이 제게 책공방에 대해 물을 때면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간단하게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탓에 대충 얼버무리게 되는 때가 있곤 합니다.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는 말이 저는 도달할 수 없기에 더 멋지게 여겨지는 듯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온전히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일에만 몰입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일만으로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아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다 보니 지금처럼 책만드는 일은 정작 뒷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제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제가 가진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만 할까봐 겁이 납니다. 진정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할 것입니다. 온 삶을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할 수 없다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지금 내 앞에 마주한 일에 집중하고 매 순간 ‘행복’이라는 삶의 목적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아님, 장장 5일이나 되는 긴 연휴가 지났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해 저는 되도록 많은 일들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던 탓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책공방에 다닐 때만큼이나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문득 ‘내가 뭐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모두 제가 선택한 일인데 간혹 선택을 했던 내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이러한 일상이 남의 탓인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마음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사막’과도 같습니다. 그나마 지난 번 주아님의 편지를 받고서는 잠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했는데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또 다시 바싹-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아님과 저를 이어주었던 삼례라는 드넓은 교실에는 책공방이라는 특별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공방이 내년엔 이곳에 없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지 2주가 되어 가는데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삼례를 사랑하게 됐던 이유이자 저의 뿌리와도 같은 공간을 더 이상 삼례에서 볼 수 없게 된다니 저는 정말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지난 2013년 완주군에서는 삼례에 책마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하에 삼례문화예술촌이 조성되었고 이후 삼례책마을 문화센터가 조성되고 현재는 그림책 미술관을 조성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완주군에서는 삼례문화예술촌의 수탁기관 아트네트웍스와의 계약이 만료되었다고 책공방도 함께 정리가 될 것이라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합니다.


제가 책공방에서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지역 청년의 한 사람인 저에게 삼례에 책공방이 있다는 사실은 오로지 삼례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문화가 있다는 자부심이 되어 주었습니다. 전국에 어딜 가도 책공방 만큼 멋진 곳은 흔치 않고 그동안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책공방이 가진 콘텐츠에 박수를 쳤고 책공방을 품은 완주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삼례, 책공방의 시대’가 마무리 된다니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린 탓에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이제 저는 모르겠습니다. 간곡하게 설득도 해 보았고, 민원을 넣기도 했고, 여러 사람들의 힘을 빌이기도 했고, 의도치 않게 언론의 힘도 빌려 보았으나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음을 경험했습니다. 몰상식과 막무가내에는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겨루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동안의 그러한 과정이 과오가 된 것인지 이러한 결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산 방문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다만 지난번 말한 밤은 이제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도 때가 있듯 자연의 계절에도 때가 있습니다. 옥광이라는 녀석은 제 때를 보내고 자신의 시간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내년 이맘 때 쯤에나 만날 볼 수 있습니다. 카톡으로 말했듯 초대를 해놓고 보니 주아님이 발병이 나서 현재 치료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아차- 싶었습니다. 밤이야 설렁설렁- 줍는다 해도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가팔라 발목에 무리가 갈 것 같아 추진에 소홀했습니다. 그러니 옥광과의 첫 대면은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비정에 여산 출신 할머니들이 많았다니 무척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마 제가 여산에서 자랐다고 하면 그분들도 무척 반가워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병기 생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병기 선생님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콘텐츠를 잘 채워놓지 않고 건물만 덩그러니 지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오신다면 함께 가보면 좋겠습니다.



아참 지난번 질문의 답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학교 일을 비롯해 다양한 일을 맡았던 이오덕 선생님과 달리 권정생 선생님은 산골에서 거의 홀로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럼에도 권정생 선생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에게 벗어나 자유로워지려 노력했고 그런 마음을 담아 이오덕 선생님께 당부의 말을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지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었을지 둘 모두에게 하고자 했던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아님 내일부턴 부쩍 추워진다고 합니다. 반소매에서 긴 소매가 아닌 도톰한 외투로 갈아타야 할 것 같습니다.


2020년 10월 5일 새벽에 이승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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