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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Jul 30. 2023

2013-3. 마음을 움직이는 물성을 경험하다

2013-3.

마음을 움직이는 물성을 경험하다 


물건이든 옷이든 한번 사면 참 오래 쓰는 편이다. 새것일 때는 새것인 대로 좋고 낡으면 낡은 대로 좋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빳빳한 느낌의 새것보다는 푸근함이 느껴지는 헌것이 좋다. 그리고 이건  내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내 취향과 맞다면 누가 쓰던 물건이나 옷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는 편이다. 내가 이렇게 빈티지의 멋과 맛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책공방 덕분이다. 책공방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바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물성’이다.



캐비닛만 열었다 하면

‘아이고 이 귀한 게 여기 있었구나’


책공방에는 책 만드는 기계와 도구 외에도 온갖 잡다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캐비닛이다. 한때 선생님께서 모으셨던 물건 중 하나다. 선생님께선 내가 공방에 오던 첫날부터 언제 한번 캐비닛을 싹 정리해야 하는데 하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더니 어제 퇴근 전, 내일은 캐비닛 정리를 할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라 했다. 캐비닛 안에 있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름표를 붙이면 되는 일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헌데 막상 정리를 하려고 보니 ‘캐비닛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캐비닛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오밀조밀 잘도 박혀 있는 이 캐비닛 속에 대체 어떤 물건들이 들어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 많은 캐비닛을 열 때마다 ‘아이고 이 귀한 게 여기 있었구나’ 했다. 처음엔 정말 귀한 건데 내가 ‘뭘 잘 몰라 그 가치를 아직 모르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캐비닛을 열 때마다 매번 그러시니 나중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정말 귀한 것인지 아니면 선생님은 그냥 습관적으로 하시는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게 정말 다 귀한 것이냐고 물으니 정말 하나같이 다 귀한 것이라고 했다. 이 캐비닛 안에 들어간 것은 모두 귀한 것이라고. 대부분에 캐비닛에는 앞으로 ‘책 만들기’ 수업에 사용할 재료들이 들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 만들기’ 문화를 전파하고자 하는 선생님에겐 이 물건들이 모두 귀한 것임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제야 캐비닛을 열 때마다 ‘아이고 귀한 것이 여기 있었구나!’ 하는 선생님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하루 종일 책공방 보물 상자인 캐비닛 정리에 매달렸다.  해 놓고 보니 참 예쁘다.



그리고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보다 무언가를 정리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사람들을 맞이할 때 항상 조금은 긴장 상태였는데 새로운 캐비닛의 서랍을 열 때면 호기심이 앞섰고 물건의 종류나 양을 보고 어떻게 정리를 하면 좋을지가 착착착- 보였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 물건이 딱 떨어지게 정리될 때의 쾌감은 깔끔함과 상쾌함 그 자체다.


 

‘노루표 활판잉크’가 대체 뭐라고



이틀 만에 다시 찾은 사무실에 못 보던 깡통이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날 맞이한다. 그것도 꽤 좋은 자리에서 말이다. 다른 곳에선 어디 구석에 쳐 박혀 있거나 지금 당장 분리수거를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다. 그도 모자라 어제 들어온 주제에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위풍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책공방에서 장님이나 다름없는 나는 별다른 감흥 없이 선생님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어제 저걸 가져오며 흥분해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선생님은 왜 저 양철 깡통 따위에 흥분을 하셨다는 걸까 1차 갸우뚱. 이 양철 깡통은 20년 전에 나온 것인데 저렇게 상표가 붙어 있는 것은 정말 귀한 것이란다. 대체 이 양철 깡통 따위가 뭐라고 선생님은 저리 침을 튀기시며 이야기를 하는 걸까 2차 갸우뚱.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깡통이 우리 공방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저기 붙어있는 상표라벨 덕분이었다. 만약 저 라벨이 없었다면 다른 곳에서처럼 책공방에서도 고물 취급을 받았을 텐데 저 라벨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덕분에 이리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 라벨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란다.


‘노루표 활판잉크’라고 쓰인 저 라벨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저 깡통이 20년 전에 어떤 목적으로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란다. 그리고 저 라벨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저 깡통을 통해 20년 전 활판인쇄기를 주로 사용하였던 그 시대를 상상하고 엿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저 라벨이 대체 뭐라고? 난 좀 의아했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선생님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척했다. 나의 연기가 미흡했는지 선생님 스스로 뭔가 아쉬웠는지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독일보다 금속활자를 앞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어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직지심체요절’을 찾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기록은 역사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이 없다면 예전의 우리 금속활자 기술이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사소해 보이는 이 라벨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선생님의 이야기에 수긍이 갔고 고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서 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저 깡통의 위엄이 느껴졌다. 이제 어디서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하신 몸이라 하니 잘 모셔야겠다.



회사는 망해도 흔적은 남는다


오늘은 택배가 하나 왔다. 허름하기 짝이 없고 무식하게 큰 상자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했다. 선생님은  오늘은 이걸 좀 정리해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장갑을 건네신다. 뭐가 들었기에 상자를 여는 게 아니라 정리를 하자 할까 하고 상자를 열어 보니 온갖 잡동사니들이 담겨있다. 남들이 보면 쓰레기를 택배로 보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잡동사니를 보물 다루 듯했다.


30년 전에 충무로에 봉투 회사가 하나 세워졌고 한참을 잘 나갔을 것이다. 물론 몇 번의 위기야 있었겠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 위기를 잘 이겨내다가 점점 봉투를 쓸 일이 적어지자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곳에 가서 그 흔적들을 모아 왔고 지금은 그 흔적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니 남들 눈에 쓰레기 상자 같아 보이는 이것들을 보물 상자 다루 듯할 수밖에. 선생님은 지금 이 물건들을 통해 봉투회사의 30년 세월을 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봉투회사의 30년 세월과 함께 선생님의 이야기가 더해져 또 하나의 히스토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명함이나 소품들이 잔뜩 했다. 정말이지 아날로그 감성이 줄줄 흘러내리는 물건들이 그득했다.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표현을 빌리자면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것들이었다. 한 겹 걷어내면 그 밑에는 새로운 것들이 있고, 또 한 겹 걷어내면 또 다른 색을 지닌 것들이 들어 있었다. 색색깔 층별로 색깔이 다른 건물 같았다.



모두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가 있었다. ‘The Life'라는 제목이 적힌 장부였는데 30년 동안의 세월의 액기스(?)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공책을 제작할 때부터 그러한 의미를 담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라는 제목을 가진 공책에 30년 동안에 세월이 녹아들었다는 사실은 왠지 우연 같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이 회사의 사장이 처음 회사를 세우고서 부푼 꿈을 안고 이 공책을 준비하며 가슴 설레지 않았을까? 그 밖에도 행운의 2달러며, 낡아진 명함과 고무인,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주전자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이 쏠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오늘 이 보물박스에서 나온 물건들을 보며 난 이 회사의 초장기 시절을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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