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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Aug 27. 2023

2013-7. 아르바이트생에서 수습생으로

2013-7.  

아르바이트생에서 수습생으로

 

책공방 10년 차가 된 나는 대부분의 일에 심드렁하다. 실제로 웬만한 일에는 감정이 쓰이지 않기도 하고 웬만한 일에 되도록 감정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면도 있다. MBTI 세 번째 자리가 명확하게 F지만 일을 할 때 감정은 정말이지 도움이 한 개도 안 된다는 걸 너무나 뼈저리게 느낀 탓에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툭툭- 튀어나올 때는 속수무책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T라고 오해하는 걸 보면 나의 노력이 효력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 책공방 1년 차의 이승희 정말이지 감정을 줄줄줄 흘리고 다닌 모양이다. 온갖 사소한 일에 의미부여를 하고 신나 하고 설레고 창피해하고 자책하고. 시간이 무서운 건지, 나이가 무서운 건지, 그동안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무서운 건지. 원래부터 지금의 온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뜨끈뜨끈했는지는 잊고 있었는데 과거의 기록에 과거의 내가 선명하다.


책공방 사원증은 레고 목걸이

책공방에는 책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와 물품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 선생님은 책공방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를 건네는 공간이길 바란다. 그러니까 책공방은 책을 만드는 곳인데 오늘은 책이 아닌 목걸이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까진 아니지만 손수 고리형 나사를 고정하고 끈을 걸어 매듭까지 예쁘게 지어주었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내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는지 ‘고정 나사를 구하느라 쎄가 빠지게 고생을 했다며 진짠지 가짠지 모를 이야길 한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선생님은 사소한 것도 소홀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책공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모으고 제각기 알맞은 위치를 찾아 배치하는 등 선생님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선생님의 그런 정성 덕분에 책공방은 사람들로부터 ’우와, 공간이 너무 예쁘다 ‘등의 감탄을 자아내는 곳이 되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책을 만들어 보자는 책공방의 취지에 걸맞게 이 목걸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똑같이 생긴 목걸이가 있다 해도 이 목걸이에 담긴 마음이 다르고 만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 함께 만든 두 친구 또한 비슷해 보여도 조금은 다르다. 이게 바로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손맛이 아닐까 싶고 이 손맛은 음식을 만들 때만이 아니라 이렇게 무언가를 만드는 모든 것에서 매우 중요하겠구나 싶다. 처음에 선생님이 레고로 목걸이를 만든다고 했을 땐 그냥 ‘우와 귀여워요’ 정도였는데 막상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그냥 ‘귀여워요’가 아니라 ‘정말 짱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퇴근 시간 맞춰 찾아온 세 살배기 우리 조카님은 오랜만에 본 이모는 안중에 없고 덥석 안겨서는 목걸이를 움켜쥐고 놓질 않는다.


선생님은 이 레고 목걸이가 책공방 사원증이 되어 줄 거라고 했다. 왜 하필이면 레고였을까? 지금은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책공방에 집합해 있는 이 레고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에 함께하며 집이 되고 성이 되며 꿈을 키우는 도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님은 책공방도 이 레고처럼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공간, 자꾸만 오고 싶어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을 항상 기억하고 나에게도 전하고자 레고를 가지고 책공방 사원증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아이들이 레고를 통해 꿈을 키워나갔듯 우리 책공방도 아이들의 꿈을 자라는 공간으로 더 나아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깊은 뜻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공방 사원증을 목에 걸고 책공방에 방문하는 어린이 친구들을 맞았다. 역시나 반응이 좋다. 책 만드는 기계보다 내 목에 걸린 레고 목걸이에 관심을 빼앗겨 홀린 듯 나를 따른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하면 책도 이 레고처럼 아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사원증이란 이런 것인가. 20130728


 

책공방 이승희,

아르바이트생에서 수습생으로

오늘부터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수습 기간을 시작하기로 했다. 다니던 학원을 정리하고 책공방에 몰입하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책공방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명쾌하게 딱 떨어지게 설명되진 않지만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지의 세계지만 힘이 들면 들었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직감적으로 힘든 길임이 뻔히 보였다. 빙산의 일각이라 할 수 있는 지난 두 달간의 시간도 솔직히 나는 조금 힘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길을 계속 가겠다는 것일까. 뭐라 답할 말이 없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이 그냥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데 엄청 끌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왜 잡아야 하는 줄은 잘 모르겠지만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아마 무척 배가 아플 거라고 했지만 지금은 거기까진 모르겠다. 현재의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나는 이 공간이 좋고 이 공간의 방문객이 아닌 관계자가 되고 싶다는 정도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내가 꿈꾸던 벽면 책장이 너무나도 멋있게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이 공간이 좋아서 그럴까 생각해 보지만 약하다. 책공방과 선생님을 만난 뒤 머릿속이 잠잠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선생님은 항상 더 큰 세상이 있으니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고 보라고 했다. 어쨌든 나는 2개월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뒤로하고 책공방에 몰입을 해보기로 했다. 우선은 5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갖기로 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 별로 없는 나라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하다 보면 경험을 쌓다 보면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있다. 130731


 

말뿐이 아닌 마음과 행동으로

가면이 있다면 얼굴을 가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오늘 팝업북 수업 중에 어찌나 얼굴을 가리고 싶은지 혼났다. 2주 만에 내가 수업을 했고 팝업북도 오랜만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체크를 했어야 하는데 뭐에 정신이 팔려 그랬는지 넋을 놓고 있었다. 첫 수업 때만큼 어버버-했다. 너무너무 창피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는 말을 알 것만 같다. 뭐든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것 같다. 아니 욕심을 부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될 수도 노력이 될 수도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수업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있었지 그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랬으니 결과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다. 선생님 말씀처럼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야 하는데 난 자판기처럼 내가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실력이 나아지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 투자한 시간만 많다고 투덜거리며 집중하지 않고 타고난 능력이 없다고 불평만 했었다. 물론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라는 공자님 말씀을 입으로만 나불대고 머리와 가슴에는 새기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매일 마음속으로 새기고 또 새겨야 하겠다.

 

 

책 만들기도 기획자도 낯섦 그 자체

선생님께서 며칠 전에 내주신 숙제를 오늘 해보려고 폼을 잡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작품이 나올는지 기대된다. 내가 처음 책공방에 와서 면접을 본 후 생각했던 것은 이곳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멋진 공간에서 나는 손님이 아닌 관계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한 마음에서 긴가민가하며 아르바이트 생활을 시작했고 이제는 수습사원이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수습사원이 되고부터 선생님은 이것저것 나에게 숙제를 내기 시작했다. 책공방의 팝업북 만들기는 ‘서울 명소’에 관한 숭례문 팝업북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인데 책공방이 지역에 내려온 만큼 지역과 책공방의 이야기를 담은 팝업북을 새로 만드는 중이다. 며칠 전에 밑그림이 나왔는데 그것을 인쇄해 본을 따고 기획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라는 숙제가 주어져 열심히 작업 중이다.

내 손 끝에 따라 그림이 재단되는 과정을 보며 이 책이 완성되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에 바람이 분다. 물론 내가 아이디어를 내서 시작된 것도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미약하나마 하나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무언가에 내 손길이 들어가는 것은 모두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밑그림을 따라 움직이는 내 칼질 하나에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만 같다. 읽기만 했던 책을 만든다는 것도, ‘기획자’라는 단어도 너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뭐든 새로운 것은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130810

 

 

난 아직 사고뭉치

티셔츠 만들기 수업 준비물에는 밑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연필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연필을 모두 모았다. 새 연필부터 시작해서 몽당연필까지, 연필심도 안 나와 있는 것, 뾰족한 것 등 다양하다. 가지각색 연필을 깎으라는 미션을 받았다. ‘오! 드디어 저 연필깎이를 써보는구나’하고 살짝 신이 났다. 책공방 사무실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예쁜 연필깎이를 항상 눈으로만 봐왔지 어떻게 작동이 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책공방에 조금은 익숙해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선생님이 시키거나 내가 사용하는 것들 이외에는 뭔가 만지기가 무섭다. 괜히 잘못 만졌다가 망가져 버릴까 봐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선생님의 미션을 받았으니 당당히 연필깎이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선생님은 생긴 건 이래도 물 건너온 일본산이라는 자랑과 함께 전압이 220V가 아니니 110V볼트라고 변압기를 연결해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납작한 아이를 동그란 아이로 바꿔주는 돼지코(변환 플러그)를 찾아 꽂고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찰나였는데 선생님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부른다. 내가 꽂아 놓은 돼지코는 모양만 바꿔주지 전압을 낮춰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좀 전에 내가 한 대로 그냥 꽂았으면 기계가 망가진다고 했다. 코드를 꽂을까 하다가 안 꽂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여기서 마무리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스크랩북 수업 중에는 준비물을 하나를 빼먹어 급하게 수업 중에 준비물을 챙겼다. 이 또한 내가 수업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수업하던 중이었으면 또 완전 당황해서 허둥지둥했을 게 뻔하다.


이 밖에 내가 모르는 실수들도 많을 것이다. 요즘 나는 열심히 사고를 친다. 그래도 이렇게 멀쩡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소소한 즐거움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옛날의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물건들이 공방에서 귀한 대접을 받듯 이러한 평범한 일상들이 나중에 내 작은 보물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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