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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희 Sep 03. 2023

2013-8. 책공방이 이야기하는 ‘고급’이란

2013-8.

책공방이 이야기하는 ‘고급’이란

 

릴스, 숏츠가 대세다.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책공방도 이 트렌디함에 발맞춰 나아가야 하는데 잘하지도 못하겠고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예전에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어 애가 닳았던 때가 있다. 다 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면서 애를 쓰다 몸도 닳았다. 가랑이가 한 번 찢어져 본 기분이랄까. 지금은 정체성과 지속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유행에 민감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한테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뭐가 유행하면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유행보다 내 스타일이 우선이다. 내가 생각하는 멋의 기준이 생겼고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안다. 물론 유행을 따르는 것과 유행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 지금도 요즘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지’ 정도는 하려 한다. 하지만 역시 나는 트렌디함보다는 유니크함이 더 좋다는 쪽이다.  이러한 나의 취향은 온전히 책공방에서 비롯된 듯하다.


 

천이 다 삭아버린 가방

선생님이 내일  출장을 간다고 짐을 꾸린다.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기더니 저 구석에 박혀 있던 가방을 꺼냈는데 겉만 멀쩡하지 속이 엉망이다. 너무 오래된 탓에 가방의 내부를 감싸고 있던 천이 삭아서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버리고 새로 하나 장만하거나 다른 가방을 찾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님은 아니었다. 그 가방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다른 가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방 정비에 나섰다. 삭아버린 천을 과감히 다 뜯어내고 가방 안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러면서 천은 삭았으니 버릴 수밖에 없지만 가방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했다. 


천을 모두 떼어 버리고 걸레질을 한 후 물기까지 말리니 가방은 말끔해졌다. 어떤 사람은 이 모습을 보고 지지리 궁상이라며 ‘가방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하나 새로 사라’고 할지 모른다. 솔직히 나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저 가방에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저리 소중하게 여길까 싶어 무슨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고 물었다. 예전부터 출장 가방으로 사용한 가방이라 의미가 아예 없다 할 수는 없겠지만 내 생각처럼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이 다 삭았으니 낡음을 넘어 망가졌다고 할 수 있고 이 정도면 그 소임을 다 했다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왜 그럴까? 형편이 그리 어려운가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내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돈이 아닌 가치의 문제였다. 선생님에게 이 가방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함께한 동지와 같은 존재로 자신의 역사를 증명하는 물건이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가방이 낡았다고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오랜 시간을 함께할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었다. 가방의 천이 삭아버린 것은 마음 아프지만 오늘 이렇게 해서 이 가방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또 덧씌워지게 되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까는 볼 품 없어 보이던 가방이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마치 아픈 아이가 약을 먹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모습처럼 씩씩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책공방에는 새것이 별로 없었다. 옛것을 좋아하는 선생님의 취향을 넘어선 가치 지향의 결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소비한다. 똑같이 100만 원을 벌어도 어떤 이는 그 돈의 대부분을 저축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을 치장하는데 쓰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돈을 사용한다. 오래된 물건을 모으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사람의  겉모습과 말이나 행동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진 물건들을 통해서도 자신을 나타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선생님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물성’이다. 세상 어디에 가도 그 물건이 가지는 성질은 변하지 않으며 그러한 물건을 지니고 그 소중함을 아는 이들 끼리는 통한다고 했다.


나 또한 내 물건들에 애정을 담고 그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오래된 것보다는 새것이 더 좋았다. 그런데 공방에서 생활하고,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점점 오래된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남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무엇이 소중한지, 내게 있어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130717

 

 

“흔적을 주어라, 모두 기록이다”

오늘은 ‘유치원생을 위한 미니북 만들기’ 수업이 있었다. 30 분 전부터 하나 둘 그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가자는 열여덟 명이었지만 유치원생이라 부모님과 형제자매까지 모이니 공간이 꽉 차버렸다. 선생님은 아주 귀한 팁을 하나 알려주겠다며 이야기에 시동을 걸었다. 그 팁은 바로 아이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꼼꼼히 모으라는 것이었다. 그림이든 일기든 간에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기록하게 하고 그 기록을 모은다면 정말 귀한 재산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상장이나 우수한 성적표 같이 잘한 것만을 모으는데 그러지 말고 모두 다 모으라고 했다. 빵점 맞은 시험지도 모으고 벌 받을 때 쓴 반성문도. 아이가 잘한 것만이 아닌 아이가 잘하지 못한 것, 아픈 기억 등도 아이의 역사이니까. 또한 그것이 훗날 아이가 시집・장가갈 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라 하셨다.


처음엔 조금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적극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 공간도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우리 역사다. 아이들의 흔적 또한 잘했든 못했든 그 아이의 흔적이고 그것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 지금은 당장은 별 게 아니고 사소하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정말 귀한 재산이다. 오늘 만난 모두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는 열심히 아이의 흔적을 모아 아이에게 귀한 재산을 선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방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하는 것이 내 역할 중 하나라 잘 찍든 못 찍든 그냥 의무적으로 찍는다. 잘 찍어 보려 해도 좀처럼 되지 않았다. 어떤 사진이 잘 찍은 사진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찍어야 잘 찍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서 헤매는 중이다. 잘 하지 못하는 일, 어떻게 해야 잘하게 되는지 모르겠는 일을 매일 하려니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일이 조금 즐거웠다. 어린아이들이라 그런지 꾸밈이 없고 표정이 살아 있었다. 책공방에 출근하고부터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오늘 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다. 어제 ktv촬영으로 인해 늦은 퇴근과 그전에 쌓였던 피로들로 인해 많이 지쳐있었는데 조금 힘이 났다. 역시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생기는 나에게 최고의 보약이다. 130804

 

 

항도인쇄 할아버지의 메리야스 박스

아침 일찍 시작해 목포에 다녀와서 정말 쉬지 않고 물건을 정리해서 실어 창고에 넣기까지 정말 힘든 하루였으니 곯아떨어질 법도 한데 선생님은 보물 상자를 풀 듯 조심스레 자료들을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과자상자를 풀어보듯 잔뜩 신이 나서 꽁꽁 동여맨 끈을 풀며 “이야 진짜”를 무한 반복한다.


힘들었을 텐데 쉬지도 않고 정리 또 정리를 하신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과 이 물건의 주인인 할아버지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중요하거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관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귀한 걸 신문지에 보관하는 선생님처럼 항도인쇄 할아버지는 귀한 걸 메리야스 박스에 보관하셨나 보다. 대부분의 자료가 메리야스 박스에 들어있었는데, 그 메리야스 박스를 하나 열 때마다 그 안에는 재미난 것들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이 정리하는 물건들은 1951년 6월 27일 개업한 항도인쇄소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 안에는 진귀한 것들이 많았다. 최고의 제본 회사였다는 ‘이우사’에서 1963년에 만든 공책이 있는가 하면 유인물, 요금 산출 기준표 같이 인쇄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것까지 정말 다양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귀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 물건의 원래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쓰레기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처분을 하였단다. 그리고 그것을 그 후배 할아버지가 인수해서 이끌다가 이제 너무 힘이 들어서 처분을 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책공방에 오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걸 가지고 나중에 아주 멋진 전시를 할 거라고 했다. 선생님의 말처럼 이 물건들이 귀해 보이긴 했지만 멋진 전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을 보러 가면 대부분 최고(最古)로 오래되었거나 최고(最高)로 멋진 것을 위주로 전시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요즘은 인쇄 박물관을 하더라도 기계만 들입다 갖다 놨지 히스토리가 없다고. 선생님은 미싱으로 엮은 ‘예금통장’이나 ‘인쇄 단체 협약서’ 같은 히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그래야 사람들이 전시품을 통해, 전시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말하는 감동이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남들이 귀하다고, 멋지다고 하니 ‘아, 그렇구나’하면서 하는 감동은 가짜다. 내가 보고 직접 느낄 수 있어야 진짜 감동이다. 선생님은 공적인 역사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선배들이 만들고 대중이 사용했던 것들 또한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도 역시나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주입식 교육이 진행되었다. 1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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