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선생님의 강의 내용 중 ‘눈을 키워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어떤 눈을 가지느냐에 따라 무언가를 볼 수도, 못 볼 수도, 잘못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좋은 눈을 가져야 한다. 그동안 나는 좋은 눈을 가지려는 노력보다 좋은 것을 보려고만 했다. 내가 가진 눈을 탓하지 않고 좋은 것이, 볼 게 없다고만 투덜거렸다. 아무리 좋은 것을 앞에 두고도 눈이 없어 볼 수 없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좋은 것을 보는 것과 좋은 눈을 갖는 것은 다르다. 이제 좋은 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 볼 생각이다.” 10년 전 팔월 둘째 날의 기록을 마주하니 나는 이제 좋은 눈을 가졌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좋은 눈을 가진 건 같으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 나 스스로를 좋게 만드는 힘은 아직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가지게 된 건 분명하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른 관점이다. 과거의 기록을 살피며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변치 않음을 넘어서 녹슬지 않고 숙성이 되고 발효가 되는 힘은 무엇일지 생각한다.
오늘은 KTV 촬영이 있었다. 어제는 KBS, 오늘은 KTV. 선생님의 바람대로 붐을 일으키고 있나 보다. 이처럼 매일까진 아니지만 방송 촬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선생님은 며칠 전부터 나에게 몇 번이나 오늘 방송 촬영이 있음을 강조했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럴까 싶었는데 시간 맞춰 도착한 촬영 팀의 장비를 보니 단번에 이해가 갔다. 달랐다. 그동안에 했던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하는 식의 방송이 아니었다. 더구나 삼례문화예술촌 전체가 아닌 책공방 단독 촬영이었다.
촬영 팀의 장비 규모는 상당했는데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조명이었다. 커다란 조명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됐다. 첫 직장에서 조명 담당을 했다는 선생님은 반가움을 표했다. 과거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자신이 들었던 조명이 오늘은 자신을 빛나게 해 준다니 뭔가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촬영 준비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촬영 시작 전에 조명에 무슨 셀로판지 같은 것을 자꾸 끼었다 뺐다 하신다. 조명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신경을 쓸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조명 감독님이 옆으로 오시더니 등 색깔을 바꾸면 공간이 훨씬 따뜻해 보일 거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조명을 비추고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조명 감독님뿐 아니라 작가님도 소품의 위치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인터뷰이인 선생님이 최대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 진심인 사람들의 손길로 책공방의 모습은 한층 멋지게 카메라에 담겼다. 못 보던 천이 책상 위에 깔리고 지난번에 내가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었던 상자가 열리고 주황색 조명 아래 선생님은 장인의 모습이 되었다.
촬영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라는 미션을 받아 미션 수행하느라 선생님의 이야기에는 집중을 못 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인 한 가지에 몰입하면 그 외의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는 특징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자신의 일에 진심인 사람들의 일하는 풍경을 지켜볼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단 5분의 영상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노력이 투입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130803
다음 주에 큰 행사가 하나 있다. 한 번에 20명만 넘어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120명씩이란다. 그것도 티셔츠 만들기다.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넘어 석 달이 다 되어 가지만 난 아직도 할 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초짜다. 아직 티셔츠 만들기는 해 보지 않아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 몰랐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해 보는 것이다. 처음엔 잘 못하고 실수도 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보단 두 번째가 그리고 그다음이 점점 더 나아지면서 배운다. 그렇게 배운 것은 절대 안 까먹는다. 책공방에 신기한 기계들의 쓰임도 다 이런 식으로 기술이 전해졌다고 한다. 암튼 그래서인지 어쩐지 선생님은 처음인 내게 뭐든 참 잘 시킨다.
오늘의 미션은 티셔츠 만들기 수업 준비다. 120장이 되는 티셔츠에 종이를 넣었다. 티셔츠에 종이를 넣는 이유는 판화를 찍은 티셔츠에 잉크가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전에 티셔츠 정리할 때 안에 종이가 다 들어가 있기에 주문하면 이렇게 들어 있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일일이 넣었던 것이다. 저 박스가 다 티셔츠였다.
선생님은 방법만 알려주시고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웠다. 처음엔 ‘이걸 언제 다하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재밌게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래 얼마나 걸리나 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재어 보았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엄청 오래 걸릴 것 같았던 일이 40분 조금 넘게 걸렸다.
선생님이 내게 자주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는 너무 앞서간다는 것이다. 난 좀 그렇다. 항상 좀 앞서간다.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발생할 일을 걱정하는 습관이 있다. 해보지도 않고 먼저 걱정부터 하는 스타일이다. 오늘처럼 일단 막상 해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을 그동안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130809
책공방에 와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여기서 일하면 행복하겠어요!”라는 메시지였다. 그럼 나는 대부분 그렇다며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뭐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거짓말 같은 일과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쳐 가고 있다.
책공방에는 여러 가지 ‘책 만드는 기계’가 있으나 설명이 붙어 있지 않다. 이것들은 전시하기 이전에 우리가 사용하는 것들이고 우리는 박물관이 아닌 공방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책 만드는 기계 설명서’를 별도로 준비했다. 그것도 그냥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스탬프를 찍어 완성해야 한다. 한꺼번에 많은 설명을 주르륵 듣는 것이 좋은 면도 있고 좋지 않은 면도 있다. 대부분의 아이는 공방에 들어서면서 “우와”라는 탄성을 내뱉는다. 그리고 내게 이 기계가 뭐 하는 것이냐 로봇같이 생겼다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은 설명이 부족하다며 설명이나 안내를 비치할 것을 제안하곤 한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설명이 붙어있게 되면 기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이 기계를 이해하기 전에 기계가 내뿜는 기운 즉, 물성을 느끼길 바랐다. 기계를 처음 마주했을 때 ‘아 이거 뭐 하는 거구나’ 하며 이해하고 인식하기보다 ‘이건 대체 뭘까?’ 호기심을 갖고 상상하길 말이다.
아이들은 곧잘 선생님의 의도대로 행동하는데 어른들은 느끼기보다 이해하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계 하나하나마다 설명이 다 붙어있으면 간편하겠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끝이지 더 나아가질 못할 것이다. 미술관에 가도 작품에 설명이 작게 붙어 있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책 만드는 기계 설명서’를 가지고 사람들과 소통으로 잘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은 공간에서는 사람도 멈춰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처음에 여기서 일하면 행복하겠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듣다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면 무언가를 하다가도 내다봐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편히 보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설명을 해주길 원한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다 이야기만 해줘도 좋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상대방인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 같다.
공방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간의 아름다움만 보지 그 아름다운 공간을 꾸리기 위한 노력이나 정성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130906
“쾅쾅쾅!!” 아침부터 망치질을 했다. 내일모레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스크랩북 수업이 있다. 스크랩북 수업에 필요한 여러 준비물 중 하나인 손잡이를 만들었다. 손잡이 작업은 조금 까다로워서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처음에 불량을 몇 개나 냈는지 모른다. 총 55명 수업이므로 여분까지 하면 거의 60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양을 해 보기는 처음이다.
손잡이를 만들 때는 만들면서 ‘하나 만들고 하나 확인하고’하는 식으로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하다 보니 꾀가 났다. 다 만들어 놓고 한꺼번에 확인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나게 마구마구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만드는 것이 잘 만들어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만드는 것을 잠시 멈추고 확인 작업을 하였다. 다행히 모두 통과이긴 했으나 어떤 것은 빡빡하게 아주 잘 만들어졌는가 하면 어떤 것은 조금 헐거운 감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보니 ‘꾀부리지 말고 조금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더라도 정도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만들고 하나 확인하고 하는 식으로 해야 내가 그 느낌, 즉 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몽땅 만들어 놓고 나중에 확인하는 것은 불량을 제거하는 것뿐 불량이 적게 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확인하는 과정에서 잘못 만들어졌으면 그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하나를 만들고 하나를 확인하는 식으로 하면 바로바로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좀 헐거우면 그다음번에 더 세게 치고, 너무 세게 쳤으면 그다음에 조금 살살 때리고 해서 그렇게 해서 감을 익혀야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빠른 시간 안에 손잡이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를 잘 만드는 감을 익혀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손잡이를 만들어야 한다면 나보다 선생님이 훨씬 빠르겠지만 그렇게 계속 선생님이 하면 나는 계속 느리고 할 줄을 모르게 된다. 이렇게 자꾸 내 손으로 해보는 경험을 쌓아야 내 것이 된다.
인생도 그렇다. 끊임없이 내가 잘살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또 방향을 잃고 길을 잘못 들었더라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인생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하면 방향을 잃고 잘못된 길로 가게 되고 다시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된다. 끊임없이 인생에 대한, 내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손잡이를 치며 공부를 했다. 때론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는 길이 오히려 지름길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나도 험해 보이는 길이라도 지름길인 그런 진정한 길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진정한 지름길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말이다. 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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