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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y 14. 2023

누군가와 동시대를 산다는 것

부활절 날이었다. 연로하신 이전 담임 목사님께서 은퇴한 이후,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한지도 어언 3년이 되어간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목사님은 코로나가 시작되자마자 교회에 오셨고, 그래서 마스크 벗은 우리들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셨다. 코로나가 시작되고는 영상 예배로 전환되었고 찬양대도, 식사도, 모임도 모두 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노인 비중이 많다 보니 마스크 벗기까지 굉장히 조심스러웠는데, 어쨌든 그런 날도 뒤로하고 올해 4월에는 부활절 연합예배라는 걸 하게 되었다. 


"나도 언니랑 같이 학교 다녔으면 참 좋았을 것 같아. 재미있었을 것 같아."


연합 찬양을 앞두고 화장실에서 셔츠를 바지 속에 넣을지, 뺄지, 거울 앞에서 어린 동생과 논의하던 찰나였다. 어린 동생은 내가 알기론 나와 띠동갑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학생인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친구가 아주 어릴 때 화장실에 혼자 가기 무섭다 하여 고등학생인 내가 같이 가줬던 그런 귀여운 추억들이 있다. 저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러게.' 한 마디로 압축했지만 왜인지 저 말이 요즘 자주 귀에 맴돈다.


누군가와 동시대를 산다는 건 축복이다. 동시대를 살기 보다 누군가와 같은 시간과 문화를 공유한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전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진 낯선 팩스 소리를 듣고, '알포인트가 생각나는군.'라는 내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알포인트는 소재가 전쟁과 군인이라 더 무서웠던 것 같아.', '그 시절이 감우성의 리즈시절이었어.' 모두가 한 마디씩 추억 소환을 하고 있을 때 유독 조용했던 한 아이가 있다. 24살이었던 막내였다. 우리가 동시대를 살았다는 건, 어디에 살았든 간에, 그만큼의 시간을 같이 공유했다는 증거다. 나는 그 느낌이 참 좋다. 우리가 비록 처음 만난 사이라 해도, 누군가의 나이가 나와 비슷한 또래임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묘한 친숙감을 느낀다. 이 사람도 나와 동일한 그 시대를, CD 플레이어와 MP3로 음악을 듣던 그 시절을,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와 만화책을 빌리던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니까.


내겐 그런 사람이 있다. '저 사람과 학번이 비슷했다면 어땠을까?'라고 느껴지는 사람 말이다. 우리는 9살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가끔 그 친구와 같은 학번이거나 비슷한 학번대를 살았다면 너는 내가 아는 지금의 남자 친구들과 어떻게 다를까, 어느 정도 비슷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그와 동시대를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9년의 시간차를 넘어 동시간대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해야 할까. 이런 생각은 부활절 찬양을 앞두고 셔츠를 뺄지, 말지, 빼는 게 더 날씬해 보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던 나에게 어린 학생이 느꼈던 감정과 동일한 건지 궁금하다. 


누군가가 나와 동시대를 보내길 원한다는 건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는 절대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낼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상상을 한 번쯤 하면 가슴 한켠이 아련하다. 그리고 나와 같이 학창 시절을, 대학시절을, 취준생을, 보릿고개를, 그리고 직장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사람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짧은 시간을 같이 공유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서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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