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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Aug 24. 2019

2019년을 같이 시작한 몇 권의 책


독서 편식이 심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중·고등학교 땐 한국 소설을 좋아했다. 문제집을 열면 잔뜩 튀어나오는 한국소설들은 모두 고등어 반 토막처럼 쪼개져 나왔고, 시험을 볼 때마다 자습서를 볼 때마다 항상 소설 전체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부터 시작해서 오발탄까지, (요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대화할 때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책을 읽었다. 


영문과를 다니면서 제일 좋았던 건 희극을 배울 수 있어서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의 희극 수업은 연극이 디폴트 값이었다. 그래서 햄릿을 한 학기 동안 읽으면서 모든 대사를 입으로 읽어야 했기에, 햄릿이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고(혹은 더 나아가 내가 햄릿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영문과의 특성인지, 교수님의 특성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당시 교수님은 맥베스의 부하가 앞에서 칼로 찔렸는지 뒤에서 칼로 찔렸는지, 그 대사만 읽고도 도망치다 죽었는지 싸우다 죽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며 엄청난 정독을 시켰다. (결론은 앞에서 찔렸어야 명예로운 죽음이다. 뒤에서 찔렸다면 도망치다 찔린 거다. 우리는 대사 한 줄만 보고도 이런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다.)


대학 졸업 이후 책 다운 책을 읽은 적이 없다. 인턴을 하면서도 취업하고 나서도 그닥 읽은 적은 없다. 그러다 2015년 여름에 나는 직장 상사의 권유 아닌 권유로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다. 책 이름은 '성채'. 7월에 빌려주셨는데, 나는 7월 내에 이 책을 돌려줘야 한다는 쫓김에 시달렸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성채'는 정말 두꺼운 책이다. 누군가가 냄비받침으로 쓰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말리고 싶다. 책이 너무 두꺼워서 분명 높이가 안 맞을 것이다. 여하튼 꾸역꾸역 뭔가를 하는 나의 이상한 집념이 발동되었고, 나는 2주 만에 성채를 독파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오랜만에 읽은 고전소설이 너무 재밌었다. 


그 뒤로 다시 독서와 무관한 삶을 살다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딱히 책을 권한 건 아닌데, 그 사람과 대화를 하려면 나도 책을 읽어야만 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었고,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도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읽고 있다. 


1.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고독한 미식가 저자인 구스미 마사유키의 푸드 에세이다.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를 보고 알라딘에 검색하다 이 책이 걸려 나와서 아무 생각 없이 읽게 되었는데, 묘하게 책이 재밌다. 26개의 음식에 대해 담담하게 설명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식문화가 비슷해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입맛도 충분히 자극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흰쌀밥을 엄청 먹었다.) 특별한 내용도 없는데 책을 다 읽어갈 때쯤엔 아쉬움이 남는다. 


2. 능소화 

: 네이버 북판에서 보고 '오, 한번 읽어봐야지'라고 생각했던 소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흥미로운 점은 분묘 이장을 하다 나온 편지를 바탕으로 소설이 작성되었다는 거다. '재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굉장히 쓸쓸한 소설이다. 


3. 점선의 영역 

: 아마도 창비 인스타에서 보고 묵혀뒀다 읽게 된 소설인 거 같다. 예언을 하는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라는 말을 주인공에게 남긴다. 인트로가 강력하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니? 책이나, 이야깃거리나, 소개팅이나, 마케팅이나 다 똑같다. 인트로가 강력해야 한다.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어야 한다. 아쉽게도 이 소설은 뒤로 갈수록 본질이 흐려지는 느낌이 강했다. 


4. 2019 트렌드 노트: 생활 변화 관찰기 

: 새해를 맞아 트렌드 노트를 읽었다. 작년엔 '소확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싫어서 몇 장 읽다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소비자의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작던 크던 소비자의 패턴을 고려해서 적절한 마케팅을 해야 한다. 어느 순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마음으로 2019년 트렌드 노트를 읽었고 결과는 꽤 만족. 생활 변화 관찰기라는 소제목에 걸맞게 말 그대로 생활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친절하게 보여줬다. 

 

5. 걷는 사람, 하정우

: 하정우에 대한 책이다. 처음엔 안 읽으려고 했다. 하정우, 내가 아는 셀럽 하정우의 화려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편견이 이렇게 무섭다) 책을 읽으면서 물론 하정우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지만 사람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굉장히 오랫동안 해왔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정우라는 사람도 했다는 것도 신기했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건 그가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거...였다.... (사실 내가 하정우를 떠올릴 때면 내 머릿속에는 쏘 스윗한 그의 모습이 아니라, 황해에서 김윤석이랑 같이 족발로 사람 패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책 읽기에 부담을 느낀다. 나도 그렇다. 책을 읽지 않으면 묘한 죄책감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꼭 활자 책을 읽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만화책을 읽다 주인공이 내뱉은 명대사에서도 감명을 받았고 깨달음을 얻은 적이 무척 많다. 그냥 뭐라도 읽자. 길 가다 찌라시라도 읽고, 간판 글자도 읽어보고, 엘리베이터에 붙은 벽보도 읽고. 뭐라도 읽고 나만의 생각을 남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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