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슨 영문인지 고모가 나와 동생 앞으로 각각 50만 원을 보내주셨다. 엄마는 그 돈을 이체하며 덧붙였다.
“고모가 염색할 돈 아껴서 모은 거란다. 너희 주려고.”
일, 십, 백, 천, 만, 십만. 내 통장에 처음 찍힌 엄청 큰 숫자. 돈의 출처를 알고도 나는 그 돈을 펑펑 써댔다. 시내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며 차갑게 반짝이던 유리 벽 너머 걸려있는 싸구려 옷을 마음껏 입어보고 마음껏 샀다. 양손 가득 비닐봉지, 종이 가방을 들고 오랜만에 깔깔깔 웃어보았다. 친구들과 술을 실컷 마시고,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죄책감은 잠시였고, 그보다 더 짧은 쾌락은 달콤했다. 고모가 건넨 50만 원은 잠시나마 내 불행을 잘라내주었다. 열다섯 살 ‘아빠 없는 나, 뭐든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나’라는, 스스로 달아놓은 자기 연민의 꼬리표까지도 싹둑 잘라준 가위. 나는 여느 스무 살처럼 웃고 떠들 수 있는 세상으로 입장했다. 그해 겨울, 나는 고모의 흰머리를 땔감 삼아 나를 덥혔다.
스물한 살, 찬 기운이 한창 쨍하던 설날 아침. 할머니는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차례상에 올리고 남은 밤을 마저 깎는다. 남동생은 거실 차례상 위에 고봉으로 쌓여있던 나물이며 과일을 주방으로 옮긴다. 엄마는 튀김은 튀김대로, 과일은 과일대로 플라스틱 통과 비닐에 정리해 넣고 젖은 행주로 한 번 마른행주로 또 한 번 제기를 닦는다. 나는 큰 양푼에 차례상 위에서 식어버린 흰 고봉밥을 퍽퍽 퍼 넣고 참기름 향 짙게 밴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무나물을 양껏 넣고 비볐다.
‘딩동-’ 손아귀 힘껏 휘두르던 숟가락을 멈추고 양푼을 내려놓았다. 손을 옷에 대충 닦은 뒤 현관문을 열고 순간 멍하니 문밖을 바라봤다. 하얗게 피어오른 내 입김 뒤로 은빛 쪽 진 머리의 낯선 여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모...?’ 내 기억 속 모습과 완전히 다른 사람. 쇼커트에 자연스러운 컬이 아름답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정말로 눈 내린 벌판처럼 은색으로 변해있었고 길어진 머리는 쪽이 져 있었다. 어리벙벙한 채 고모의 양손 가득 들린 종이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서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저 다 비빈 비빔밥을 밥그릇에 나눠 담으며, 쪽 진 머리에서 자꾸만 멈추는 시선을 깜빡깜빡 바쁜 듯 거두었다.
“염색 그거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들어서 안 했다. 어떻노? 쪽 진 머리도 괘얀체?”
고모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비빔밥을 드셨다. 그런 고모를 보는 내 속은 영 편치 않았다. 보내줬던 50만 원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묻지는 않을까 자꾸만 눈치를 살폈다. ‘그 돈은 이제 내 수중에 없는데...’ 끝내 물어지지 않은 물음 앞에서 나는 잠깐 부끄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내게 든 감정은 부끄러움보다 거대한 '물음표'에 가까웠다. 자주 보지도 못하는 고모는 어떤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런 애정을 보내는 걸까. 도대체 가족이란 게 뭐길래.
시간은 착실하게도 흘러 나는 이제 마흔이 되었다. 2026년 새해 아침, 의무감에 가까운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아주 오랜만에 고모에게도 카톡을 보냈다. 어색한 공기를 메우려 우리 집 고양이 ‘무어’의 사진과 함께.
“고모~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희 집 고양이 귀엽죠?”
답장은 금방 왔다.
“너처럼 초롱초롱 예쁘다.^^”
순간, 툭 하고 무언가 끊어졌다. 15살, 때 이른 상주였던 나도, 20살 철없던 조카였던 나도, 이제 마흔이 된 나도 고모 눈에는 여전히 ‘초롱초롱하고 예쁜’ 생명체라니. 나는 홀린 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을.
“초롱하게 잘살아 보겠나이다 고모. 저 이제 마흔인데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 고모가 해주셨던 말들이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사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쪼-금 알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얕은 한숨에 코끝이 시큰해질 무렵, 고모가 사진을 보내왔다. 거친 줄기와 메마른 잎 사이로 용케도 흰 빛을 터뜨린 목화. 파란색 방수포 위에 가지런하게, 수북하게 뉘어져 있는 목화 하안- 아름. 동양화풍 초록색 산이 그려진 오래돼 보이는 흰색 화병에 높낮이가 다르게 꽂혀있는 목화 한 다발.
“그대에게도 한 다발 안겨주고 싶은데~~!”
동문서답도 유전인가. 한참 동안 휴대폰 액정 속 하얀 목화솜을 들여다보았다. 20년 전, 고모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던 차가운 서리 같던 은발. 그 은발이 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따뜻하고 포근한 목화솜이 되어 내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색을 아껴 나를 물들여준 사람.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더 먼 시선으로 묵묵히 나를 지켜보는 나의 고모.
글은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발행됩니다.
이전 글 '동문서답도 유전인가 (상)'
> 보러 가기
이전 글 '내 사랑은 쌩쌩 꼬리를 흔든다 (상)'
>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