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아- 아직 아직? 이제 열어봐도 돼요?"
"에헤-이, 쪼-금만 더 기다리보자. 자-꾸 열었다 닫았다 해가지고, 물이 깜짝깜짝 놀래겠다."
짐짓 미간에 힘을 주고 엄한 척하는 아빠의 가늘게 뜬 두 눈은 반짝이는 윤슬을 닮았다. 나는 냉장고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이렇게 하면 얼음이 더 빨리 얼기라도 할 것처럼. ‘우웅-’ 하고 돌아가는 냉장고 모터 소리는 어서 냉동실 문을 열어보라는 유혹처럼 들리고, 그 유혹에 내 심장은 덩달아 세차게 박동한다.
겨울방학 탐구 생활 과제, <소금물과 맹물 중 무엇이 더 빨리 얼까?>. 잠시 고민했지만 내 가설은 단호했다.
“당연히 맹물이지! 바다는 한겨울에도 안 얼잖아. 그러니까 짠 물은 잘 안 얼 거야...! 아빠 맞죠?!”
해운대, 광안리, 송정 바닷가를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바다의 딸 이지혜. 이 숙제를 위해 나는 그렇게 자주 한겨울의 바닷바람을 맞았던 건 아닐까. 내 기억 속 바다는 찬 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었지. 그런데 알 듯 말 듯 웃고만 있는 아빠의 표정을 볼수록 내 확신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아빠는 정답을 미리 알려주는 법이 없었다.
‘에이, 혹시... 설마...?’
20분 간격으로 냉동실 문을 열어보고 사진을 찍자고 약속했지만, 나는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혹시라도 아빠에게 들킬까 손가락 발가락 끝에 잔뜩 힘을 주고 조심조심.
아빠 몰래 문을 열 때마다 얼굴로 확 끼쳐오는 하얀 냉기, 성에가 낀 냉동실의 비릿하고 차가운 냄새. 문틈 사이로 조금 전과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두 개의 물 잔이 왠지 얄밉고 고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두 개의 물 잔을 잠시 째려보다 문을 닫는다.
20분에 한 번, 아빠 입회하에 공식적으로 냉동실 문을 열었다. 냉기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찌직- 척’. 묵직하고 커다란 카메라는 아빠의 손 위에서 막중한 임무에 책임을 다하는 소리를 내며 조리개를 끝까지 오므렸다 다시 열었다. 그러기를 네댓 차례. 마침내 맹물 컵 표면에 하얀 막이 생기고, 살얼음이 껴서 불투명해진 걸 확인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라니.
"오오오- 아빠! 제가 맞췄어요! 맹물이 이겼따!"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몸 밖으로도 터져 나온 기쁨은 나를 소파 위, 온 집안을 방방 뛰게 했다. 내가 세운 가설이 눈앞의 현실이 되었을 때의 벅찬 희열. 세상의 비밀 하나를 직접 풀었다는 성취감에 콧구멍이 절로 벌렁거렸다. 넓어진 코평수만큼 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날이었다.
겨울의 실험실이 '변화'를 관찰하는 곳이었다면, 여름의 실험실은 '힘'을 목격하는 곳이었다.
“으음-! 자- 읽어볼게요.”
아빠와 남동생을 소파에 앉혀두고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탐구생활을 읽어 내려간다. 과일을 깎아 가져오는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내 목소리엔 조금 더 힘이 실린다.
“이 실험은 물, 온도, 공기, 빛이 씨앗 발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대표적인 과학 실험이다. 젖은 키친타월이나 흙에 씨앗을 심고 조건을 다르게 하여 비교 관찰하며, 며칠 후 뿌리, 떡잎, 본잎이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와아-” ‘짝짝짝’. 엄마와 아빠, 동생의 박수가 쏟아진다. 생각지 못한 박수갈채에 조금 어리둥절하지만,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탐구 생활에 쓰여 있는 대로 강낭콩 씨앗, 종이컵, 탈지면을 준비했다. 낮게 자른 종이컵 두 개 중 하나에는 젖은 솜을, 다른 하나엔 마른 솜을 깔고 딱딱한 콩을 몇 알씩 올렸다. 어느 쪽 콩이 싹을 틔우는지 관찰하는 게 전부인 실험이었지만, 아빠의 설명과 함께하면 이마저도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지혜야, 이 콩알에서 새싹이 나올라하믄, 야-가 얼-마나 힘을 써야 되는지 아나?"
며칠 뒤, 꾸준히 물을 주어 수분을 잔뜩 머금은 퉁퉁 불은 콩에 변화가 생겼다. 검정에 가까운 보라색 껍질이 드디어 찢어지고, 그 사이로 연두색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해가 잘 드는 거실 쪽 베란다. 아빠와 나는 나란히 앉아 막 트기 시작한 새싹을 들여다보았다. 올챙이 뒷다리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꿈틀거리는 생명의 의지 같은 것. 살아 있는 것의 신비.
"지혜야, 여기 봐라. 하나, 둘!"
‘찌직- 척’.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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