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평수와 광대 (하)

by 책여사




"지혜야, 여기 봐라. 하나, 둘!"

‘찌직- 척’.


베란다의 햇살을 삼킨 카메라는 어느새 우리를 ‘내 모습 사진관’ 2층 구석,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만들어 둔 암실로 데려다 놓는다. 위가 비스듬하게 잘린 작은 문이 열리고 ‘탈칵’ 소리와 함께 천장에 매달린 작고 붉은 등 하나가 켜진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은 차단되고 아빠와 나는 붉은 바닷속 잠수함에 들어온 듯 고립된다.


코를 찌르는 시큼하고 비릿한 약품 냄새. 어둠과 습기, 독한 냄새가 뒤섞인 이 좁은 공간은 어린 내가 혼자서는 결코 들어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암실 밖에서 이 작은 문을 바라볼 때면 왠지 무언가 ‘웍-!’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아 빠르게 눈길을 거두는 곳. 화장실을 갈 때 꼭 지나쳐야 하는 위치라 혼자서 화장실을 가기 싫었던 그 마음.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잰걸음을 재촉했던 두려운 곳. 하지만 지금은 아빠와 함께라 두렵지 않다. 나는 아빠의 허리춤을 꼭 붙잡고 숨을 죽인다. 이곳은 이제 무서운 어둠 속이 아니라, 아빠와 나만의 비밀 기지가 된다.


"자~ 우리 콩들 잘 찍혔나 어디 한번 보까~?"


아빠는 플라스틱 집게로 하얀 인화지를 집어 투명한 액체가 담긴 트레이에 조심스레 밀어 넣는다. '찰랑, 찰랑.' 아빠가 트레이를 잡고 살살 흔들자 붉은 조명을 받은 약품 위로 검고 붉은 잔물결이 인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트레이 안을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던 하얀 종이 위로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흐릿하던 형체는 점점 선명해지더니, 이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낸다.


"어! 나왔다! 아빠! 이거 콩 맞죠!?"

"쉬-잇, 쪼-끔만 더... 이제 됐겠다."


아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인화지를 건져내 옆 칸의 물로 옮긴다. 헹굼을 마친 젖은 사진을 집게로 집어 공중에 매달린 빨랫줄에 탁, 하고 건다. 똑, 똑. 사진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줄에 걸린 사진 속에는 마술 같은 장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침저녁으로 찍어둔 강낭콩은 물론, 분무기로 물을 주는 나, 싹을 보고 입을 떡 벌린 나, 펄쩍펄쩍 뛰는 나. 아빠의 렌즈는 콩보다, 그걸 바라보는 나를 더 오래 담고 있었다. 아빠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나에게 오래 머문 그 시선이 사랑이라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을 테다.


'석-컹. 석-컹.'

갓 나온 사진들을 커다란 작두로 반듯하게 자르는 아빠. 10 곱하기 13센티, 네모난 인화지 안에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멈춰 있었다.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는 나, 환언되지 못하는 경이에 압도되어 있는 어린 나를 보며 아빠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사진 뒤에 풀을 잔뜩 발라 탐구 생활에 붙일 부록을 만들었다. 방학 전까지 엄마가 버리지 않고 반듯하게 접어 모아둔 지난 달력 뒷면에 인화해 온 사진을 꾹꾹 눌러 붙였다. 연필을 쥔 검지에 힘이 바싹 들어가고, 그 힘을 받아주는 중지와 손날을 느끼며 왠지 든든한 기분을 느낀다. 사진 오른쪽 아래 주황색으로 박힌 날짜와 시간을 또박또박 옮겨 적을 때, 내 눈엔 어느새 아빠 눈 속의 윤슬이 옮아와 일렁였다.


풀을 잔뜩 먹어 쭈글쭈글해진 종이 사이사이에 빳빳한 인화지들이 껴 있어서 탐구생활 책장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다. 정성껏 페이지를 메운 나의 탐구생활은 우리 반에서 가장 두껍고 뚱뚱할 것이다. 선생님이 교탁 위에서 내 탐구생활을 여보란 듯이 펼쳐 보일 때 쏟아질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상상하니, 즐거움에 벌써 광대뼈가 움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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