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거로운 행복 (상)

by 책여사



안녕하세요, 할머니. 건강하신가요?

이렇게 삼십 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당신께 불쑥 편지를 내밀다니. 참 저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갑자기 미래의 당신께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궁금하시겠지요. 단순히 병오년 새해도 밝았겠다, 앞날이 궁금하거나 복을 빌고 싶은 거였다면 차라리 복채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서 용하다는 신점을 보러 가거나, 그보다 더 용하다는 AI에 생년월일시를 입력하고 사주팔자 음양오행을 묻는 게 속 시원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그런 연유가 아니에요. 오래전 할머니께서 마음에 품은 결심이 삼십 년, 사십 년 후에도 유효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부와 안부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게 되었답니다.



2025년 11월 함께하기 시작했던 ‘어딘 글방’을 기억하시나요? 아마도 기억하실 겁니다. 그 글방이 당신의 삶을 꽤 바꾸어 놓았으리라 짐작하니까요. 글방에서의 2026년 1월 글감이 ‘그래, 결심했어!’였지요. ‘그래’에 이은 쉼표와, ‘결심했어’ 뒤 따라붙은 느낌표까지. 글감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오른 건 어린 시절 보았던 TV프로그램 속 한 연예인의 얼굴이었지만 이내 당신은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 온 하나의 결심을 마주하게 되었지요. 그때까지 그 결심을 잘 지키며 살아온 당신이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소리 내 발화한 적 없었고 글로 써 내려간 적은 더더욱이 없었기에 특별히 고민스러운 며칠을 보냈더랬죠. ‘내가 과연 그걸 쓸 수 있을까?’



마음 같지 않은 글쓰기 진도에 깊은 한숨 쉬기를 며칠째. 당신이 살면서 한 결심이 어디 그것 하나뿐이겠습니까. 다른 글감을 찾아볼까 하고 지금껏 잘 지켜내고 있는 결심과 지켜내지 못한 더 많은 결심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 결심만이 이제는 나를 좀 꺼내어보라 소리치고 있었어요. 외침에 가까운 소리에 당신은 적잖이 당황했지요.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만큼 일필휘지, 쭉쭉 쓰이면 좋았으련만 그 소리에 귀 기울일수록 키보드 위의 손가락은 갈팡질팡 길을 잃어만 갔습니다.



어지러워만 가는 쓰기는 잠시 내려놓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머리도 마음도 식혀보자 당신은 마음먹었어요. 그때 집어 든 책은 이슬아 작가의 2026년 신간 『갈등하는 눈동자』였습니다. 작가의 각별하고도 허심탄회한, 그러면서도 초기작보다 넓어지고 또 날카로워진 글을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특별히 비비언 고닉의 저서 『상황과 이야기』에 대해 쓰며 ‘내 안의 타인’, 자기 안의 ‘특별한 서술자’를 발명해야 한다고 일러주는 부분에서 오랜 시간 멈춰 있었지요. ‘내가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이 글감에 대해 나는 어떤 서술자를 발명할 수 있을까 하고요.



내 안의 서술자 발명은 요원한 채로 페이지는 마지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특수교사 김성은’을 인터뷰한 마지막 글에서 ‘발명’ 아닌 ‘발견’을 하게 되죠. 전맹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십 대의 화자가 언젠가 할머니가 되어있을 자신에게 미리 보내둔 편지. 그 편지에서 김성은은 미래의 자신에게 약속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당신은 글쓰기 관련 일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먼 훗날 좋은 글을 써낼 스스로를 기다려 달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그는 편지했습니다.



사실 삼사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까지 당신이 건강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최소한 우리의,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와, 당신과, 당신일, 우리의 오랜 결심이 유효했다는 뜻일 겁니다.



나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우리의 오랜 다짐을 부디 잘 지켜내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무거운 첫 다짐 위에 쌓아간 수많은 다짐들을 언젠가 어떤 이유에서 저버리게 된다 하더라도 첫 다짐 하나만큼은 지키며 살고 계시겠다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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