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188 (230914~230922)
| 속수무책으로 어두운 방에서 어둠인 문장들은 우두커니로 밝았지
/ 「망명」 (p.110)
<시인의 말>
언젠가 거듭 작별하는 꿈에서 너는
손 위에 검은 돌멩이를 쥐여주며 말했지
“새를 잘 부탁해. 죽었지만”
2023년 3월
육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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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3) 3부로 이루어진 시집의 시작과 중간, 마무리에 Prelude와 Interlude, 그리고 Postlude까지 들어가 어쩐지 한 편의 음악 같다는 느낌도 드는 시집이었다. 현실보다는 꿈, 특히 악몽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시들이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빛과 어둠, 꿈과 현실, 그리고 금지된 ‘영원’, ‘소년’, ‘천사’. ‘시를 쓸수록 악몽이 진화하’지만(「고락푸르행 따깔 티켓」), ‘다 그만둬도/꿈을 그만둘 순 없고/다 포기해도/꿈에선 포기할 수 없’고(「등 뒤에 바보라 쓴다 해도 나는 바다로 알 거야」),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주 많이 필요해서 쓴다.’는 (「시론에는 원고료가 없고」)는 화자. ‘밤과 아침을 포개어두어’ ‘영원과 하루가 나란한’(「나란히」) 것처럼, 금지된 ‘영원’, ‘소년’, 그리고 ‘천사’를 넘어 현실과 꿈도 언젠가는 나란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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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혹시 고사리 장마라는 말, 아니? 이곳에선 봄장마를 고사리 장마라고 한대. 난로 앞에 앉아 산책길에 묻어온 그늘들을 말리고 있어. 구름이 세상을 기어 건너는 계절이야. 지나가지 않는 과거의 기억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겠냐고 내게 물었었지. 그렇게 묻는 너의 표정을 떠올리면, 눅눅한 보라색 벽지 속으로 어제 보았던 별과 해변이 동시에 스며들어. 나의 흐린 대답들은 오래전 이곳에 마침표를 똑똑 찍으며 사라졌어. 비 오는 바다 위로 비가 내려. 고사리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나 사람의 이야기를 숙덕일 것 같은 밤이야. 미안, 오늘 시작되는 말로만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 「고사리 장마」 (p.23-24)
| 웅얼이며 어른거리는
가루눈 그림자들을
시간의 노이즈로 이해해보지만
나는 시간을 잘 모르고
하늘에서 얼굴로 다가오는
눈송이를 바라볼 때면
어디론가 날고 있는 기분이 든다
/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p.137)
| 이 마음은
꺼내 볼 때마다 다른 것이 되니까
마지막에 딱 한 번만 꺼내어 마주보기로 했지
그래서 네가 나타나면
유일한 마음과 함께 끝나는
꿈의 마지막이었다
/ 「접속—함께」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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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시>
Prelude
「희망의 내용 없음」
1부 | 면벽중에 벽을 잃어
「물끄러미, 여름」
「다나에」
「고사리 장마」
「장마」
「부레」
「자정의 기도」
「쉴 만한 물가」
Interlude
「하다못해 코창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말미잘을 보고도 네 생각이 났어」
2부 | 스스로에게 배웅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고향, 잠」
「겨울의 예외에서」
「고락푸르행 따깔 티켓」
「등 뒤에 바보라 쓴다 해도 나는 바다로 알 거야」
「시론에는 원고료가 없고」
「신호 대기」
3부 |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
「나란히」
「망명」
「정오의 비틀림과 오후의 뒤틀림, 자정의 흐느낌과 새벽의 헐떡임」
「산티탐 프렌드」
「벽을 닦아 거울을 얻어」
「영원 금지 소년 금지 천사 금지」
「접속—함께」
Postlude
「순진한 의인화—소돔의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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