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okyoulovearchive Sep 30. 2023

천선란, 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핀시리즈 소설선 043 (230928~230929)



단 하나였던 삶의 목적을 잃은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작가의 말, p.158)


| 첫 문장: 랑의 엔진이 꺼졌다. (p.9)


 (23/09/30)


* 고고: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가 랑이 죽자 자신의 목적을 찾아 나섬


* 과거로 가는 땅: 랑의 죽음 후 고고가 가고자 하는 곳


| “드카르가 언덕 너머 멈추지 않는 돌풍의 시작점에 그게 있대. 그것이 바람을 일으켜 드카르가의 언덕을 검은 벽으로 만들었다고들 해. 물론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말해준 사람은 없어. 거기까지 갔다면 다시 이곳으로 올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 곳에 도착하면 모든 걸 이룬 거니까.” (p.37)


* 감정: 감정은 로봇인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건 고고도 감정을 학습하고 흉내 낸다는 것이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따라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살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고고


|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내가 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쩐지 비참하다는 단어를 쓰고 싶다.

  (...)

  "완벽하지 않더라도 보기에 그럴싸하면 돼. 네가 감정을 진짜 느끼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느끼기에, 그 애가 그렇게 느끼기에 그렇다면 된 거야. 안 그래? 그냥 다 따라 하는 거야. 인간이라고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영혼을 뺏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다고 믿는 순간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시치미 떼. 감정도 네 것이라는 듯이 행동해." (p.131, 134)


———······———······———


<랑을 향한 고고의 애틋한 애도와 사랑의 여정>


| 조와 랑 — 지카 — 버진 — 알아이아이 — 살리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소설의 제목이 ‘랑과 나’의 사막이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랑뿐만이 아니라 고고에게도 ‘사진’에서 ‘그림’이 된 사막. 후반부로 갈수록 이 이야기의 제목은 ‘고고의 사막’이 아니라, 꼭 ‘랑과 나의 사막’이어야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랑과 나의 사막』이라는 '그림'은 결국,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세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고고가 사막을 그림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작품해설 | 오정연, 길 위에서 우리는,  p.150)


  소설에는 랑을 향한 고고의 ‘감정’이 가득하다. 고고는 처음에는 이를 단순히 ‘오류’라고 생각해 고칠 수도 있지만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인간의 그리움을 흉내 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리를 통해 고고는 자신이 오류라 생각했던 랑을 떠올리는 행위는 사실 그리움이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따라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철저히 합리성의 원칙에 따르게 되어 있는 로봇이지만, 고고는 사막을 건너는 여정을 거쳐 과거로 가는 홀에 도착한 후 ‘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0.01퍼센트의 확률’을 따르고자 한다. 인간에겐 불가능의 수치일지 몰라도, 0.01퍼센트의 확률이라도 존재한다면 고고에게 그 숫자는 ‘존재한다’는 것.


  고고 자신은 시도 때도 없이 랑의 영상이 재생되는 것이 오류나 에러라 생각했을지 몰라도, 랑이 처음 고고를 발견했을 때부터, 그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에도 랑을 만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희망을 거는 지금까지, 고고는 한순간도 랑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게 아닐까.


  지카에게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다’고 말했다가 ‘완벽한 희망은 말이 되는 문장이냐’는 물음을 돌려받았던 고고는, 이제 본인이 그 ‘헛된 희망’을 품고 과거로 가는 홀의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버진 — 알아이아이 — 살리를 만나는 이 사막에서의 여정에서 고고가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누군가를 상실하거나 삶의 목적을 잃은 것 같을 때 고고의 여정이 문득 떠오를 것 같다. 고고는 과연 자신의 희망을 이루었을까. 랑에게 자신의 사막 횡단 여정을 신나게 전해주었을까. 이야기의 끝, 깊은 여운이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지혁, 크리스마스 캐러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