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핀시리즈 소설선 038 (230929~230930)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작가의 말, p.201-202)
| 첫 문장: 중요한 무대를 망쳐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다. (p.9)
(23/10/01) SF호러 소설이라고 해서 대체 어떤 내용일지 기대를 많이 했는데 엄청난 긴장감으로 읽어 내려갔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이 소설은 꼭 사전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읽을 것을 권한다.
*므레모사:
| 원인 불명의 화재로 유독성 화학물질이 유출돼 초토화된 ‘죽음의 땅’ 므레모사가 수십 년간 감춰왔던 장소를 개방하는 투어를 열어 여행자들이 찾아옴, 코를 찌르는 달콤한 향기가 풍겨오는 곳.
*여행자들:
| 유안 / 레오 / 헬렌 / 이시카와 / 탄 / 주연은 각자 므레모사에 방문한 목적이 있음
*유안:
| 사고로 다리를 잃고 기계 다리를 착용, 무용수로 활동했으나 사라지지 않는 환지 감각으로 고통받고 있음
*귀환자들:
| 죽음의 땅 므레모사로 돌아온 귀환자들의 신체가 좀비처럼 끔찍하게 변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해받지 못한 자가 이해받기 위해 내린 선택
므레모사 투어는 ‘재난 지역이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곳을 돌며 교훈을 얻는 여행’인 ‘다크투어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자인 유안, 레오, 헬렌, 이시카와, 탄, 주연은 각자의 이유로 므레모사 투어에 오게 된다. 사실 ‘날것, 다듬어지지 않은 비극‘을 목격하는 게 연구의 희소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시카와나, ’이르슐의 폭압과 므레모사 주민들의 비극‘을 특종으로 삼으려는 탄, 투어를 유튜브 콘텐츠화해서 므레모사를 볼거리로 삼으려는 주연 모두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지만, 가장 불쾌감을 준 인물은 헬렌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끔찍한 실패로 점철되어 있고, 자신의 비극은 비극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하며 비극을 비극으로 잊어보려는’ 사람이자, ‘다듬어진 비극’은 희석된 것이기에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인물들에 불쾌감을 느껴 더더욱 므레모사의 방문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유안이라는 인물에 몰입해 이야기를 읽어나간 것 같다.
유안 또한 개인적 비극을 경험한 인물이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무용수. 자신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사랑하는 연인 한나를 위해 힘든 재활을 이겨내고 도약하고자 하지만, 연인은 자신의 통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기계 다리와 그림자 다리의 끝없는 존재 주장으로 엄청난 통증과 고통에 시달린다. ‘살아있다는 건 움직이는 것’이라는 한나. 그러나 유안은 ‘고정된 것, 정적인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녀가 바라는 게 죽음은 아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하는 것뿐. 그것이 유안이 므레모사에 가게 된 이유다.
므레모사가 예상과 달리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땅이 아닌 활력과 생동감이 넘치는 삶의 터전이고, 이 장소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암시’에 걸린 여행자들과 귀환자들. 그리고 그 사이의 유안과 레오의 고군분투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리고 ‘므레모사의 진짜 귀환자들’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어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춤추는 유안을 보고 싶어 한 것처럼, 므레모사의 귀환자들을 도우려던 이들도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걸까? 아니면 오직 타인의 비극과 절망, 고통에만 관심을 보였던 걸까?
그래서 유안의 선택이 더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를 위해 므레모사로 향하는 유안의 선택. 유안은 이해받지 못했기에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들이 있는 므레모사에 머물기로 선택한 게 아닐까. 그녀의 선택이 이해되면서도 어쩐지 슬프다.
움직임과 멈춤의 질서가 뒤바뀐 이 공간. 유안은 한 번도 이곳에 속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곳을 마치 자신의 고향처럼 느낀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런 유안을 이해하리라.
유안은 귀환자들의 앞으로 기어가서, 검은 나무 껍질 사이 붙박인 그들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당신들처럼 되고 싶어요. 부디 나를 받아주세요.” (p.182-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