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231001~231023)
김지연, 「반려빚」
(23/10/05) 빚과 대출 상환금, 신용 점수 등으로 수치화된 믿음과, 그러한 수치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에 대한 믿음. 어느 것이 진짜 믿음이고 가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다른 종류의 믿음일 뿐이다.
반려라는 단어가 ‘반려伴侶’ 일 때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 하는 짝이나 동무 혹은 항상 가까이하거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배반(반려反戾)과 거절(반려返戾)’(이 계절의 소설 선정의 말 중)의 뜻을 지닌 단어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반려빚’이라는 단어가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정현은 셈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마음을 다 주어 ‘여생을 맡길 마음까지도 먹었기’ 때문에 ‘서일의 신용 점수를 만점’(p.20)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 보’(p.41)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정현은 아직도 서일을 믿고 싶어 하고,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p.27)고 한다. ‘반려’가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사랑을 믿는 사람. 결국 정현은 살기 위해 빚에 매달렸고, 또 살기 위해 사랑에 매달렸던 게 아닐까.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다’(p.42)고 했지만, 사실은 희망하고 욕망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너무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도 않은 결말이 이 글에 딱 알맞은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정현은 다시 ‘0’이 되었지만, 욕망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다시 마이너스로 가기보단 플러스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설사 또다시 마이너스의 세계로 빠져버릴 수도 있더라도 욕망하는 삶에서 언제나 좌절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기쁨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현이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을 수 있길, 혹은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그러니까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그 근거가 될 만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신뢰해서는 안 됐다. 정현은 서일을 너무나 믿고 싶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p.27)
이주혜, 「이소 중입니다」
(23/10/16) ‘이사’도 아니고 ‘이소’? 단어가 궁금했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레 뜻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해 글을 읽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단어를 찾아보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번역가, 소설가, 시인(가나다 순)은 각각 상훈(노견), 소리(딸), 노인(이혼한 전남편의 아버지)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두고 육지 끝에 사는 철학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어딘가 불안하고 석연찮은 구석이 있고, 서로 알게 모르게 마음이 맞지 않고, 끝내 ‘그들이 탄 차 앞으로 검은 세단 한 대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 끼어들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p.85) 사고가 난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보통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뭔가 진행될 듯, 뭔가 밝혀질 듯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풀리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채 육지 끝 철학자의 집에 도달했다고 가정하며 ‘~할 것이다’라는 미래형으로 끝나는 이야기. 이들의 여정 자체가 ‘이소離巢’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떠날 이離 새집 소巢. ‘새의 새끼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는 일’이라는 뜻으로, 어린 새는 살아남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추락하고, 그 과정에서 비상하는 법을 배워 나가는 듯하다. 이는 번역가가 ‘철학자는 왜 육지 끝에서 멈추었을까?’라고 혼잣말한 것에 시인과 소설가가 각각 ‘추락하지 않으려고.’, ‘다시 말해 살려고.’라고 대답하는 것과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성장은 ‘추락의 반의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작가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성장하기 위해선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 ‘우회하지도 후퇴하지도 않고’ 내일을 향해 곧장 가야 한다는 것. 어쩌면 마지막의 ‘사고’ 또한 그들이 ‘내일’로 향하기 위한 ‘추락’이 아닐까?
인터뷰에서 작가님이 ‘사람은 ‘다면체’이며 어디서 어떻게 조명을 쏘아주느냐에 따라 꽤 다른 피사체가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작가는 특히 공정한 조명을 쏘아야 하는 책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작가는 오히려 ‘주관적으로 자신의 인물에게 조명을 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말이 매우 새롭게 다가왔다.
서로 아주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길을 함께 떠나며 내일을 기다리는 세 사람의 연대가 좋았다. ‘돌봄’과 ‘연대’, 그리고 ‘상승과 추락’이라는 단어로 살펴보는 ‘성장’의 개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소설도 좋았지만 인터뷰 또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무수한 논쟁과 대화와 때론 독백이 이어질 것이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갈 것이다. 살고자 하는 사람도 죽고 싶은 사람도 하릴없이 그 소리와 박자에 몸을 맡길 것이다. 여름이니까. 밤이니까. 마법 같은 여름밤이니까.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그들은 무사히 육지 끝에 당도해야 할 것이다. 우회하지 않고 후퇴하지도 않고 철학자가 일러준 길을 똑바로 따라가야 할 것이다. (p.75)
전하영,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
(23/10/24) 비행공포증이 있는 인물이라니, 시작부터 나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인물에 빠져들었다.
내년이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고, 어떤 친구는 이미 ‘아줌마’에서 ‘할머니’가 되어 ‘삶이 제공하는 이 끝없는 개념적 공격’(p.118)에 억울함과 피곤함을 느끼는 여성 숙희. 숙희의 감정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정상성의 물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정도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숙희는 그 물결에 올라타지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때론 힘겹고, 외롭고, 지루하고, 또 혼란스럽기도 한 듯하다. 혼자이고 싶지만, 동시에 혼자이고 싶지 않은 기분.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고 싶은 마음’(p.137). 온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숙희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에 숙희가 윤미의 손녀 제인의 ‘조그맣고 따듯한 몸에서 발산되는 예측할 수 없는 활력을 전달받으며 예상치 못한 기쁨’(p.156)을 느끼는 게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숙희가 사랑했으나 잃어버린 온갖 것들’(p.156)은 꼭 숙희가 어떤 물결에 올라타지 않더라도 숙희에게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해서. 우리에겐 다양한 삶의 모양이 있을 수 있고, 각자는 각자의 결말로 향하는 ‘실험영화’를 촬영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떤 흐름에 올라타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나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레 흘러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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