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트리플 20 (e-book, 231020~231022)
나에게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 에세이 | 초록은 어디에나
(23/10/22) 얼마 전 『유령의 마음으로』를 읽으며 임선우 작가님의 두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해 바로 찾아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유령의 마음으로』 수록작들만큼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거기에 작가의 에세이와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는 게 독서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준 것 같아 좋았다.
세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슬픔의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슬픔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만남은 우리 삶의 통로이자 출구다.’라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인연인지, 우연인지, 아니면 기적일지도 모를 만남을 통해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를 맞이하게 되며, 어쩌면 출구가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통로로 들어가게 된다.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따뜻한 슬픔의 색’이라는 초록. 슬픔이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세 편의 이야기는 슬픔을 나누고 서로의 온기에 위로를 받으며 ‘혹이 말랑말랑해지고’, ‘새파랗고 단단한 돌이 녹으며’, ‘내리던 눈이 그치는’ 것처럼 슬픔도 따뜻한 초록의 빛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임선우가 그려내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상황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인물들은 때론 안타까우면서도 사랑스럽다. 한 걸음씩, 묵묵히 걸어가다 보면 슬픔에서도 그만큼 훌쩍 멀어질 수 있기를, 새로운 통로를 찾아 출구로 나올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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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고래가 있는 방」
: 초록 고래와 단봉낙타의 비밀스러운 만남과 위로
| 계속 걸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요? 조용히 얘기를 듣던 내가 물었다. 그러면 죽게 되겠죠. 예의 그 덤덤한 투로 유미 씨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최대한 물에 가까워지게 걷는 거죠. (...)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상처로부터 훌쩍 멀어져 있을 때가 있어요. 이것은 유미 씨의 말. 그 말이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유미 씨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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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밤, 푸른 돌」
: 만약 슬픔이 손에 만져지는 푸른 돌이라면
| 마룻바닥에 남은 동그랗고 옅은 화분의 테. 그것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자 오한이 났다. 나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은 다음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평소보다 강하게 목구멍이 조여왔고,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나는 손바닥 위로 돌 한 덩이를 토해냈다. 갓 태어난 슬픔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도 새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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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기적 같은 만남, 그리고 헤어짐
| 우리는 사마귀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작고 평평한 무덤 앞에서 영하 언니는 나에게 좋은 것들은 왜 금방 끝나버리는 걸까, 하고 물었다. 언니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언니가 나에게 너무나 좋은 것이어서, 그래서 금방 끝나버렸다는 말을 끝까지 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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