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231104~231113)
어떻게 트리밍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 첫 문장: <캐니언의 프러포즈>는 9년 전 여름 빌 모리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p.7)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23/11/14) 예술가라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 참여 제안. 그러나 전시가 끝나면 재단에서 선택한 작품 하나는 반드시 소각된다. 만약 당신이라면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책을 읽기 전에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이 완벽한 기회를 ‘작품 하나의 소각’과 맞바꿀 수 있다면 매우 저렴한 값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안이지’라는 인물에 이입해 글을 읽어가다 보니 나 또한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 도착의 순간부터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일 하나 없이 온갖 변수들로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목적지로 직접 향하며 이름처럼 ‘Not Easy’한 창작의 여정을 시작한다. 산불과 폭염, 폭우 등 각종 기상이변에서 멀찍이 떨어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한 로버트 재단의 고요함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고, 개 로버트와 안이지의 대화가 둘 사이에 블랙박스, 대니, 두 명의 통역사까지 무려 네 개의 게이트를 거쳐야 이루어진다는 것도 기괴했다. 둘의 대화를 정말 ‘소통’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고.
작품 창작의 압박과 불안감은 작품의 소각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 ‘소각용 작품’, ‘원본과 위작’, ‘진짜와 가짜’로까지 뻗어나간다. 그리고 1장에서 <캐니언의 프러포즈>와 <캐니언의 로버트> 사진 이야기가 왜 등장하나 했는데 ‘이야기와 진실’, ‘프레임’이라는 키워드로 로버트 재단과 연결될 때는 전율이 일었다.
해고된 통역사가 이야기해 주겠다던 ‘원본’, 즉 ‘편집 전의 로버트의 말’이 무엇일지 궁금했는데 이 부분 이야기는 풀리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고,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꽤나 열린 결말이라 조금 갑작스럽게 끝나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전혀 다른 스토리를 살아내고 싶었다’(p.309)는 안이지의 마음처럼 앞으로 그가 써나갈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상상하는 것도 독자의 즐거움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서 아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은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p.344)
밍크선인장의 꽃말인 '불타는 마음’. 안이지는 그 꽃말이 ‘사랑에 대한 말인가 했는데 이젠 상실에 대한 말로 들렸다’(p.264)고 했지만, 결국에 안이지의 ‘불타는 마음’은 상실보다는 사랑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결국은 대니의 예언처럼 작품과 사랑에 빠져 소각 대신 구출을 택한 그 ‘불타는 마음’. 그 마음은 작품보다 더 커다랗지 않았을까.
(*그믐에서 진행하는 은행나무 북클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윤고은 작가님의 『밤의 여행자들』과 『도서관 런웨이』를 읽을 책 리스트에 넣어뒀는데 작가님의 최신작인 이 책을 먼저 읽게 되다니 ㅎㅎ 북클럽으로 도서 제공해 주신 은행나무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
———······———······———
|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p.186)
| 어떻게 트리밍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빌의 경우에도 그랬다. 소각식을 의심한 적은 없었으나 유령 같은 작품으로 인해 그는 상하좌우, 프레임 밖의 세상을 더듬어보게 된 것이다. 빌의 말은 결국 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소각한 작품들이 어디로 가는가? 소각식 이후에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p.294-295)
| “진실이요? 잘 보관하지 못해 부패해버린다면 다 의미 없는 이야기죠. 때로는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로버트 재단의 액자 틀이 있으면 그 안에 있는 건 모두 믿고 싶은 얘기가 되지요. 그게 썩지 않는 진실입니다.” (p.312)
| 나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내가 찾는 건 아마도 <R의 똥>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이미 진짜를 선택해 갖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 남겨둔,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를 다른 하나를, 내가 선택하지 않은 하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p.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