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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Nov 13. 2023

임솔아,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

문학동네 (231109~231109)



(23/11/10) 문학동네 북클럽 티저북으로 소설의 일부분을 미리 읽은 후에 임솔아라는 작가와 이 소설이 궁금해져서 정식 출간되면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고, 이번에 읽게 되었다.


  티저북을 읽으면서 소설 전체에서 전시를 통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이어 나갈 ‘느슨하고 다정한 관계’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이들의 만남의 계기가 된 전시는 소설에서 엄청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4부의 중심인물 정수를 통해 화영, 우주, 보라의 이야기가 정리되며 가장 흐릿했던 인물 정수가 이야기를 듣고 조각 맞추기처럼 ‘맞는 자리를 찾아 배열’하는 역할을 하며 소설에 흥미로움을 더했다. 특히 마지막에 정수가 책을 읽는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대목에서는 짜릿함이 느껴졌다.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도 거기 있어.’


  화영, 우주, 보라, 그리고 정수의 이별 중 가장 마음이 갔던 이별은 ‘보라의 이별’이었다. 언니처럼 엄마와 함께 아빠에게 맞서 싸우는 대신 아빠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래서 엄마와 언니와 이별해야 했던 아이. 패밀리 레스토랑, 담배 회사의 불법 홍보 페이퍼컴퍼니를 거쳐 서른둘, 타투이스트가 된 보라에게 이제 싸움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지 같은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가 된다. 이별을 하고서야, 곁에 아무도 남지 않고서야 안도감을 느낄 것이라는 보라. 그럼에도 사실은 조금은 쓸쓸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자꾸 보라에게 마음이 갔다.


  남들과는 조금 달라 진심을 숨기고 연기를 하기도 하고, 감정을 흉내내기도 하고, 관찰을 하기도 하고, 떼쓰지 않고 그저 끌어안기만 하기도 하고, 감정을 삭제하며 자기 자신을 지우려 했던 네 명의 인물들. 그러나 그 방식은 결코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들 모두는 아픈 이별을 경험하며 자기 자신을 지키며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곁에 머무는 방법을 찾아간다. 이별은 늘 아프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며 언제든 마주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잘 헤어지는 방법 또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워가야만 한다. 이 소설은 이별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조근조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소설이라 좋았다.


———······———······———


|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어째서 석현은 다르다고 여겨왔을까. 어째서 자신은 다를 수 있다고 여겨왔을까. 손 하나가 없는 사람과 귀 한쪽이 안 들리는 사람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마땅히 그럴 거라고 여겼던 걸까. 석현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귀 때문일까. 한쪽 귀가 잘 들렸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석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 잔상과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헤어졌으니까. 이별은 우주와 선미가 함께 만들어낸 축복이었다. 실패가 아닌 결실이었다. 기어이 같이, 해냈다. 우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보라는 여전히 싸움을 했다. 이제 보라에게 싸움이란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상대로 꼭 이겨야겠다고, 승리를 쟁취해야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는 것 같은 일상 자체였다. 매대를 둘러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음식을 떠올리고 감자 한 알이나 당근 한 개를 집어드는 일과 비슷했다.


| 상상과 현실에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때처럼, 정수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도 그 경계가 없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멈춰 선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고, 도착하지 않는 미래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가 정말로 있었다고 믿을 수 있다면, 기억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없던 것을 존재하게 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정수에게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일과 비슷했다. 이야기가 귀를 타고 들어와 또렷해질수록 타인과 자신 사이에 있던 경계도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 사람이 된 것만 같았지만, 알고 있었다. 진눈깨비를 맞고 있었다던 여자. 가슴팍을 잡힌 채 경찰에게 질질 끌려갔다던 여자. 책에서 읽었지만 현실에도 분명 존재했을 그 여자. 그 여자가 정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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