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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Dec 03. 2023

정보라, 밤이 오면 우리는

현대문학 핀장르 01 (231129~231130)



약육강식의 절대적 법칙이 깔린 세계에서, 기어코 자신이기를 선택해 밤을 걷는 존재들이 있다.
(천선란, 「발문」 | p.135)


| 첫 문장: 핵융합이 일어나는 조건은 온도, 밀도, 가둠시간, 이 세 가지라고 로슨Lawson이라는 영국 학자가 밝혀냈다. (p.7)


(23/11/30)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들 중 세 번째로 읽게 된 이 책. 좋아하는 천선란 작가님이 발문을 쓰셨다고 해서 더욱 궁금했다.


 『고통에 관하여』보다는 가볍지만 『호』보다는 묵직한, 딱 중편소설 볼륨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장편소설이었다면 조금 더 내용이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장면들이 있어 짧은 분량이 약간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약육강식의 절대적 법칙이 깔린 세계에서, 기어코 자신이기를 선택해 밤을 걷는 존재들’이라는 천선란 작가님의 문장이 참 인상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생존자들, 인류를 말살하고자 하는 로봇, 로봇의 노예가 되어 충실하게 인간을 학살하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로봇 신봉자들, ‘인간과 기계의 합작품’인 흡혈인, 그리고 인간을 닮았고, 자신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인간형 로봇, 빌리. 이들 중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고자 하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존재, 그들이 ‘밤을 걷는 존재들’이다.


 ‘화장실의 미친 여자’ 이야기가 더 풀리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원래 ‘화장실의 미친 여자’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이 소설로 발전한 것이라는데, ‘화장실의 미친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도 궁금하다!


———······———······———


| 인간은 언제나 같은 인간을 죽이는 일에 무척 능숙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인간을 잘 죽이지 못했다. (p.17)


|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나에게는 없다. 피도 눈물도 땀도 체온도. 생명도. (p.83)


| 빌리는 죽었다. 빌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인조인간 제작소를 파괴하기는커녕 인간형 로봇들도 완전히 처치하지 못했다. 기계들의 계획은 하나도 저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하도 끝에 몰렸다. 밖에는 태양이 내리쬔다. 우리는 갇혔다. (p.122)


| 노예의 순리는 필요 없다. 나도 나의 죽음을, 내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햇빛 아래 재가 되어 사라지거나, 끝없는 밤하늘 아래 목이 잘리거나.

 어느 쪽이든, 오늘은 아니다. (p.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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