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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Dec 08. 2023

천희란, K의 장례

현대문학핀시리즈 소설선 045 (231207~231207)



*별점: 4.5

*한줄평: 내가 선택한 나의 ‘진짜’ 이름은

*키워드: 죽음 | 인생 | 선택 | 약속 | 비밀 | 속박 | 이름 | 정체성 | 자유

*추천: 이름, 정체성, 그리고 인생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


“우리 둘 다 언제 벗어나고 싶어질지 모르는 이 인생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봅시다.” (p.41)


| 첫 문장: 나의 이야기는 K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으며 K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누구도 두 번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p.9)


(23/12/08) 현대문학의 핀시리즈 소설선과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볼 때 단편이나 중편으로 가볍게 입문하기 좋아서 자주 찾게 된다. 천희란 작가님의 어떤 작품을 먼저 읽을지 고민하다가 핀시리즈 소설선 45 『K의 장례』를 읽어보기로 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죽음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의 죽음, 한 ‘인생’의 죽음, 한 ‘정체성’의 죽음, 그리고 한 ‘이름’의 죽음. 어쩌면 죽음이라는 단어보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이름’, ‘정체성’, ‘인생’이 소멸한다고 해도 그게 목숨이 끊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첫 문장의 강렬함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선택할 자유’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훔쳐 사용하는 대신 엄청난 거금을 주겠다고 하며, 언제든 떠날 자유를 준다는 제안. 과연 그게 정말 온전하게 ‘전희정’에게 ‘선택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대한 속임수에 빠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게 아닐까.


 또 다른 ‘선택할 자유’는 K의 딸에게도 주어진다. K의 영향 아래 있던,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인 ‘강재인’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이름 ‘손승미’를 사용하며 삶을 꾸리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게 된 건 K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손승미’라는 새 이름은 오롯이 그의 것이고, 그가 ‘선택한 자유’다.


 나의 이름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또한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나의 진짜 이름으로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 마지막에 ‘전희정’이 아닌 진짜 이름이 나올 때,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어진다.


———······———······———


| 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말해질 수 있다는 자유 속에 방목되어 있는 것, 그것이 사람들을 비밀의 함정에 연루시킨다. 나는 가망 없는 비밀의 본색을, 비밀의 유일한 공모자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p.36)


|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한 속임수에 빠져버린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선택이 과연 자유를 전제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까. (p.41-42)


| 아무도 내게 묻지 않으리라. K가 내게 약속했던 것, 그가 내게 준 것, 그것들로 만든 내 15년.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 상상조차 하려 하지 않을 내 인생 이면의 인생, 아니 내 진짜 인생. 그것은 내가 K가 없는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홀로 온전히 결정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p.45-46)


| 앞으로도 내가 고등학생 시절 옮겨 적었던 그 문장의 시선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운명에 순응도 저항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p.84)


| 그것을 받아 본 직후 나는 분노와 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끝내 나는 그것이 내게 도달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K의 문장을 욀 수 있을 만큼 거듭 읽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K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손승미, 나는 그 이름을 선택했고, 그녀는 K의 영향 아래 있지 않다. 나는 K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눈 감지 않는다. K는 그의 자리에 앉아 있고, 나는 때때로 그 자리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p.111-112)


| 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희정 선생님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령의 목소리일 뿐이죠. 전희정 선생님의 진짜 목소리는 제가 읽은 것의 그것과는 다르리라고 확신합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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