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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youlovearchive Dec 14. 2023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e-book, 231209~231212)



*별점: 4.0

*한줄평: 달콤 쌉싸름한,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키워드: 죽음, 가족 | 사랑, 소원 | 괴로움, 마음 | 원망, 애도 | 실패, 온기 | 정상성, 이해 | 반투명, 안정 | 부탁, 삶

*추천: 이야기 속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인물들에게 위로받고 힘을 얻고 싶은 사람


달아서 아리고 써서 저릿한 그 맛을 느끼는 것은 곧 소설을 읽는 기쁨을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 해설 | 소유정, 슈거 하이 Sugar High


(23/12/12) 『모든 것들의 세계』가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을, 『좋은 곳에서 만나요』가 ‘결국 사랑은 계속될 것’을 이야기한다고 쓴 적이 있다. 이유리의 첫 번째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도 ‘물음표와 느낌표를 자아내는 기이한 사건들로 가득’(해설)한 와중에도 다양한 모양의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화분이 되어 딸의 곁을 지키는 아버지, 이타적 사랑으로 외계 생명체의 연구 대상이 되는 여자,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해 버린 복싱선수, 죽은 지 오 년 하고도 두 달 후 유령이 되어 전 애인 앞에 나타난 남자, 왜가리의 사냥을 구경하는 모임원들, 돌과 대화하는 남자와 달로 날아가는 남자, 몸이 반투명해져 버린 두 여자, 그리고 멕시코까지 헤엄쳐 가겠다는 이구아나에게 특훈을 하는 여자까지. 때로는 달콤하고 향긋하지만 때로는 씁쓸하고 서글프기도 한 현실과 환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이유리의 인물들은 태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게 묘하게 위로가 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반짝이는 힘’(해설)을 준다. 언제나 사랑의 힘을 믿는 작가, 이유리와 이유리가 그리는 세계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빨간 열매」 *

: 여러 사람의 사랑이 만들어 낸 몰캉몰캉 향긋하고 달콤한 빨간 열매


|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버지와 P 어머니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자면 나와 P도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인간인 데다 나는 아버지를 P는 어머니를 닮았으니 결국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셈이었고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둥둥」

: 은탁의 소원은 자신 혹은 타인 중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 이미 교각의 불빛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꼭 형규와 나의 거리처럼. 나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다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형규를 떠올리곤 했다. 선명하게 반짝거리지만 너무도 멀어, 잡기는커녕 손을 뻗기도 미안한 나의 소년 형규. 그런데 누가 잡겠다고 했나, 사실 빠진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잡을 수도 없고 잡지도 못할 빛이라는 걸. 나는 그냥 여기, 빛이 보이는 곳에 둥둥 떠 있기만 해도 그저 넘치게 행복하다.


———······———


「브로콜리 펀치」 *

: 괴로움이 브로콜리로 피어나고 꽃을 피우며 해소되듯 우리의 괴로움도 눈에 보인다면


| 나는 어둠 속에서 원준의 브로콜리를 더듬어 잡았다. 두텁고 미지근한 줄기 밑에서 두근두근, 물이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물은 브로콜리를 한 바퀴 돌아 나와 원준의 어디로 갈까, 미움이나 분노를 만들어내는 그런 곳으로 흘러가서 고일까, 거기에 맑게 섞여들면 조금 묽어질 수 있을까.


———······———


「손톱 그림자」

: 잊어도, 잊혀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 수정 씨는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원망했나요.

  원망했어요. 그렇지만 곧 원망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냥 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어요.

  나도 같아요.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앞으로도 어딘가에 계속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나도 수정 씨처럼 수정 씨를 잊게 될 거예요.


———······———


「왜가리 클럽」 *

: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그런 일이, 그럴 때가 있지, 그래도 함께 웃어요


|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으나 그저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다고,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


「치즈 달과 비스코티」

: 이해와 오해, 그 사이의 아주 깊은 골


| “치료사님께 얘기 들었어요. 돌이랑 대화할 수 있다면서요? 지금 잃어버린 돌도 당신 친구죠? 정말 미안해요. 난 당신 말 다 믿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


「평평한 세계」

: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같은 얼굴을 지닌 것을 바라보게 될 때


| 그 증거로 우리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고 그만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가고 싶은 곳이 생길 때까지 누워 있을 거였다. 둥글납작하게, 고요하고 반반한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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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아나와 나」 *

: 기어코 가고자 한 곳에 도달한 이구아나처럼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


| 밤이면 잠든 이구아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구아나가 떠나길 바라는 걸까, 떠나지 않길 바라는 걸까. 그 질문은 곱씹고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계속하고 싶은 걸까, 그만두고 싶은 걸까. 계속하면 어떻게 되고 그만두면 어떻게 되나. 안으로 깊어지지도, 바깥으로 넓어지지도 못한 채 고이고 고여 단단해지는 그런 생각들을 알처럼 품다가 잠들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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