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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밍북 Apr 24. 2018

소설 아버지와 아들 명동예술극장 연극 관람기

뜨거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과, 정제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공연일시: 2015년 9월

공연장소: 명동예술 극장



사진_ 명동예술극장 공식 홈페이지



   상담세계, 연극이라는 것이 왜 자꾸 나를 끌어들이는가. 나는 항시 서사세계에만 머물고 싶을 뿐인데.   

 

   누구나 낭만에서 초연할 수 없는 이십 대, 나에게 연극이란 질풍노도 (Sturm und Drang)처럼 폭발적이었고 강렬했다. 그래서 연극은 오직 연극 경연을 위한 배우의 연기라고만 여겼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단연 연기술에만 관심이 있었고 당연히 뽐내기 행위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과장된 행동이었다. 무리의 예술, 연극이라는 것은 그래서 시기와 시샘이 얼룩진, 따라서 희극이든 비극이든 연극에는 ‘눈물과 땀’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맹신했다. 

  이러한 에너지가 영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다분히 소모적인 노력이 항상 뒤따른다. 무대에 연극을 올리기 전부터 이미 나는 무리에 치일 대로 치이고 뜨거운 조명에서 풍기는 땀 냄새는 무리에서 더 멀어지고픈 반항적인 태도를 일으켰다. 좋아함과 싫어함의 극한 대립은 그래서 평행적인 영속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연극을 향한 행위는 내가 갖고 있는 본질과는 정반대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대변할 수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총체였다.   


  어느 순간 나는 연극이라는 것을 슬며시 잊었고, 어떤 순간에서는 연극에 빠져있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할 정도였다. 나를 들뜨게 하고 미치게 하는 연극. 이젠 그만 잊어야지를 맹세하며 나는 물리적인 성숙을 선택했고, 그 성숙의 대가로 연극은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만큼 내가 타인과 살아 숨 쉬며 현재의 시제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 상담세계는 표면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내 내면에는 점차 큰 의미가 없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곳은 연극과 관련된 모든 것, 전부였다. 가시적인 전부가 큰 의미가 없는 그런 역설적인 공간. 무대 위의 슬픔, 눈물, 기쁨만이라도 내가 진심으로 느껴볼 수 있다면. 대사는 조명이 사그라들면서 사라지듯이 상담세계에서는 대부분 쉽게 사라졌다. 나는 사라지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연극도 그러했다. 사라지는 것을 잡을 수 없다는 것, 그 차가움을 차갑게 깨달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는 연극이라는 것을 놓지 못하면서 외유와 내유가 불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걸까. 당장 상담세계의 미니어쳐 격인 연극을 외면할 법도 한데. 나는 나의 표리 부동한 행동의 답을 결국 러시아 소설가 투루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아일랜드 극작가가 재구성한 연극에서 찾았다.     

 

   소설을 극화한 연극이라고 해서 나는 소설 플롯에 주안점을 두고 극장을 찾았다. 근사한 노장 파벨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는 건 당연한 것이다. 청춘이 아름답게 진 중년의 파벨이 내겐 어리숙한 의대 예과에 재학 중인 바자로프 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바자로프로 말하자면 참 안타깝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니힐리스트였다. 갓 스무 살의 청년이 니힐리스트라는 사실은 재앙이었다. 그가 첫눈에 반한 여자를 보고 같은 의예과 친구 아카디에게 던진 한마디가 충격적이었다. 그 여자를 해부대 위에 올려 보고 싶다는 바자로프의 말은 의대생이 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니힐리즘에 잠식당한 한 자아의 사고방식에서 유래한 촌스럽고 괴기스러운 망언이었다. 이제 막 예과에서 배운 의학 지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체하고 해체를 통해 아무것도 건질 것 없다는 니힐적 사고방식은 오만을 넘어서서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그는 그가 혐오하는 의사로서의 길을 충실히 이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세상을 ‘진단’만 하다 끝마쳤다. 진정한 니힐리스트였다면 그는 ‘진단’마저도 그만뒀어야 했다. 어쨌든, 가엾은 새내기 의대생인 그는 마음을 품은 여인에게 낭만적인 고백은 고사하고 어이없게도 환자를 진료하다 그 병에 감염되어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세계를 향한 철저한 진단은 그가 가난한 시골 의사인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결국 그를 따를 수밖에 없는 혈연의 숙명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서 나는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그가 가졌다면, 분명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좋은 방향으로 확장됐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성격은 괴상하지만 유능한 직업인으로서 숙련된 의사가 됐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를 허무하게 보내버렸다. 


  소설의 플롯은 아버지를 대변하는 구세대, 아들을 대변하는 신세대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이 플롯의 갈등을 보여주기보다는 아카디와 카챠의 묘한 감정 선, 그리고 카챠와 바자로프 아버지와의 이상한 기류, 바자로프의 죽음 이후 봉건 제도의 답습을 이어가는 괴상한 사람들의 축제에 더욱 초점을 맞춰 극을 진행하였다. 이 극은 철저히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이 각색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명동예술극장_아버지와 아들_ 무대인사 (사진 부밍북)

  

  서사세계에 있던 인물들이 내 눈앞에서 말과 말로 이어지는 상담세계의 대표적 공간 즉 무대에서는 허무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내가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미 버린 공간인데 왜 자꾸 끌려 들어가는 걸까.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원작과 다르게 연극이 전개되는 것일까 라는 불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쏟는 그 눈물이, 슬픔이, 기쁨이 참 조악해 보였지만 왜 저럴까, 자꾸 의문과 호기심이 교차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연극을 이해해야 할까라는 원론적인 물음을 해보았을 때, 그것을 보는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람하는 동안 소설의 플롯을 기억하려고만 하다 보니 연극을 제대로 관람할 수 없었다. 혹시 내가 현실을 서사세계에 무리하게 꿰맞추려다 보니 현상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순수하게 받아 들지는 않는지, 서사 세계를 처음으로 의심해 보았다.  

   

  나는 관람석에서 서사세계를 지웠다. 그리고 인물이 울면 운다, 인물이 뛰면 뛴다, 인물이 춤을 추면 춘다, 라는 사실만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마음이 움직이고 심장이 뛰고 허무하게 잊힌 의대생 바자로프를 향한 연민이 사라졌다. 그 사라짐의 의미에 대해서 깊게 고찰하지 않아도 됐다. 왜냐하면 내 눈앞에서 말과 말이 직조되어 움직였다. 그것은 순수한 세계, 즉 사라지더라도 허무하지 않을 다른 의미의 영속적인 공간이었다.  미리 사라질 것을 알고 애써 무용하다는 것이라 일갈하여 그만 나를 나에 가두지 않는 것, 그것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상담 세계의 모습이었다.  

 

 정제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항상 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부질없이 사라질 것을 향한 감정의 소모도 아니었다. 두 본질 모두 그 자체로 세계였다. 어떤 하나만의 관점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순 없었다.  

 남은 인물을 통해 나는 그다음을 그리고 또 그다음을 그릴 수 있었다. 그건 극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상담세계인 연극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나는 원동력을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움직이는 뜨거움, 심장이라는 것, 너무 간단하지만 잊기 쉬운 사실을 연극 ‘아버지와 아들’이 내게 자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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