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달빛은 화살이 되어

by 분촌

아로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렸다. 아무도 아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로가 이사금이라는 걸 알아본다 한들, 백성들은 이제 이사금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새 달이 하늘로 떠올랐고, 감초보다 달콤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이사금 보다 더 미운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로는 삼한을 적시는 단비가 자신을 때리는 채찍으로 느껴졌다. 어린아이들이 혀를 내밀어 단비를 받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로의 몸에 와 닿는 비는 바늘 끝처럼 따가웠다. 그리고 살가죽을 파고든 바늘이 자꾸만 더 깊이 자신을 찌르는 것 같았다.

비가 그치고 다시 달빛이 비추었다. 아로는 그 달빛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 볼 달을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버리고 싶었다. 두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났다. 하지만 아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밤을 새워 달리고 또 달렸다.

아로는 삼한을 벗어나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많은 날들을 걷고 또 걸어, 오랜 옛날 단군들이 다스렸다는 옛 조선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사흘을 더 걸어가면, 아홉 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는 구봉산이 있었다. 아로는 사흘 밤낮을 걸어 마침내 구봉산 기슭에 도착했다.

아로는 첫 번째 봉우리를 넘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봉우리도 지나, 다섯 번째 봉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주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오두막은 무성한 수풀에 둘러싸인 채 주인 없이 버려져 있었지만, 지붕과 서까래도 튼튼해 보였고 울타리도 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거미줄이 가득한 방 안에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로는 방으로 들어가 거미줄을 쳐내고 봇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긴긴 도망으로 지친 몸을 뉘였다. 아로는 아주 오랜만에 아무런 걱정 없이 꿀 같은 단잠을 잤다.

처음 얼마동안 아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은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아로는 여전히 달빛을 피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면, 아로는 두터운 이불로 방문과 창을 가렸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달빛을 맞게 되면 수백 개의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마음이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벽을 기대고 앉아 먹물처럼 까만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생각들은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였다.

‘난 하늘의 자손이야. 하늘이 왜 날 버린 거지?’

아로는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가장 괴로웠다. 하늘이 버린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마음에 분노가 솟구치기 때문이었다.

‘만약 빨리 달을 구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내가 왕위를 빼앗겼을까? 내가 달모시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다면, 백성들도 나를 그토록 미워하진 않았을까?’

아로의 마음에 차츰 후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나를 위해 달을 가둔 거야. 나를 위해 달모시를 죽이려고 했어.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지키려고 한 왕위는 대체 뭘까?’

아로는 그 답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좀 더 일찍 생각해 보았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였을까?’

아로는 스스로에게 끝없이 물어보았다. 답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급할 건 없었다. 이제 아로가 가진 것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수많은 시간뿐이었다.

‘나의 백성들은 불행했어. 바로 나 때문에 말이야. 아니, 나의 왕위 때문에. 오직 그것 하나 때문에. 그건 내가 이길 수 없는 욕망이었어. 난 정말 그걸 이길 수가 없었어.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어. 모두가 불행했어. 왕위 하나 때문에.’

끝없는 생각은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어나서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밤마다 창과 문을 가렸던 두터운 이불을 걷어냈고, 달빛으로부터 도망치는 일도 없어졌다. 어느 날 밤 아로는 밝은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결국은 나 때문이지. 왕위는 나의 욕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로는 그 순간 같은 달을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있을 자신의 옛 백성들을 떠올렸다.

“죽현 할아버님은 아무 탐욕이 없으셨지. 그런데도 할아버님은 아마 새 이사금이 되어 계시겠지. 백성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달을 올려다보는 아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래, 사랑 말이야. 백성들의 사랑. 어쩌면 내가 가장 갖고 싶었던 그것 말이야.”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달빛을 받은 눈물방울이 구슬처럼 빛나며 떨어져 내렸다.

“나로 인해 죽으시고 달모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신 달님, 어리석고 악한 저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기시거든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날 밤 아로는 달을 부르며 오랫동안 울음을 토해내었다.

그날 이후, 아로의 머릿속은 전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아로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과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 바라볼 수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바윗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 했다. 그러나 백성들에 대한 죄책감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아로는 잘 마른 땔감 한 아름과 잘 익은 산열매 한 바구니면 하루 종일 행복할 수 있었다. 산새들의 예쁜 노랫소리면 종일 심심하지 않았다. 고운 저녁노을이 아로의 머릿속에서 하루하루 지난 일들을 지워냈다.

스무 번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난 후, 봄이 왔다. 아로는 얼음이 녹은 옹달샘으로 가 얼굴을 비춰보았다. 검게 탄 얼굴에는 주름이 패고, 머리카락은 점점 희어지고 있었다. 두 손은 거칠어지고 굳은살이 박였다. 아름답던 이사금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진달래가 구봉산의 아홉 봉우리를 덮어가기 시작하던 어느 봄 새벽이었다. 아로는 요란한 꾀꼬리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먼동이 트는지 방문이 희뿌옇게 물들고 있었다. 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울타리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앉아 있었다. 아로는 밖으로 나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꾀꼬리였다. 꾀꼬리의 머리는 예쁜 무지갯빛 털로 덮여있었고, 몸 전체는 황금 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다. 꾀꼬리가 부르는 노래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느 꾀꼬리의 노랫소리와는 다른 데가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아로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로는 어여쁜 노랫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날이 환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쪽 하늘에 햇살이 비치자, 불현듯 금빛 날개를 파닥이며 꾀꼬리가 날아올랐다. 아로는 꾀꼬리를 좇았다. 꾀꼬리는 아로를 기다리듯 나뭇가지 위에 앉았다가, 아로가 따라잡으면 또 저만치 가서 앉았다. 아로는 홀린 듯 꾀꼬리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