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는 꾀꼬리와 함께 오랜 여행을 하였다. 기나긴 산줄기를 타고, 수많은 봉우리를 넘어, 아로와 꾀꼬리는 어느 숲에 이르렀다. 아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꾀꼬리가 이끄는 대로 계속 걸어갔다.
꾀꼬리는 어느 칡넝쿨 앞 나무 위에 앉더니 더 이상 날지 않았다. 칡넝쿨을 보는 순간, 아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 손이 떨렸다. 너무나 낯익은 칡넝쿨이었다. 아로는 조심스럽게 칡넝쿨을 들추어보았다. 그리고는 소스라쳐 놀라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칡넝쿨 안쪽에는 잔디가 곱게 깔린 오솔길이 나 있고, 오솔길 끝에는 아담한 초가 한 채가 서 있었다. 사립문 너머로 나무도 한 그루 보였는데, 보랏빛을 띤 나뭇잎들 사이로 하얀 과일들이 소담스럽게 열려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이곳은 내가 다 불태워 버렸는데. 저 나무도 내가 궁궐로 가져가 말라죽게 했는데. 이건 꿈이야. 분명 꿈인 게야.’
아로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뒤돌아서 숲길을 달려갔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 넓은 호수가 보였다. 달못이었다. 제단 위의 꽃과 술이 멀리서도 보였다. 백성들이 소원을 비는 모습도 보였다. 아로는 달못을 향해 다가갔다. 달이 달못에 녹아들어 호숫물은 눈부시게 빛났다.
아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해가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아로는 달이 떠오르기 전에 초가로 돌아왔다.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이 집을 되돌려 놓은 건 신선이겠지? 꾀꼬리를 보낸 것도 신선일 게야.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아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달빛이 방안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로는 밖으로 나와 달못으로 향했다. 달못에는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은 꿈속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달못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아로는 고민했다.
‘이제 여기서 무얼 해야 하지?’
아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오래 전 부왕과 자신이 저질렀던 끔찍한 일들에 대한 기억뿐. 잊은 듯했던 죄책감이 되살아나고, 마음은 또다시 괴로웠다.
아로의 주름진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로는 자신이 스스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이끌려 왔다는 것을 되새겼다. 달못은 신선이 주는 용서의 선물 같기도 했지만, 어쩌면 크나큰 형벌인지도 몰랐다. 아로의 마음은 다시금 바위처럼 무거워졌다.
바로 그때였다. 눈물로 아룽아룽한 눈앞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로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었다. 그러자 하얗게 빛나는 무언가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하얀 빛을 내뿜고 있는 한 송이 꽃이었다. 꽃잎에서는 은빛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꽃송이가 보석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로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보니, 달못 주변 여기저기에 똑같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로는 밤이 깊도록 꽃을 보다가, 새벽이슬이 내릴 즈음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아로는 신비로운 꽃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꽃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로는 두 눈을 비비며 달못 가장자리를 몇 바퀴나 돌아보았다. 온갖 들꽃이 만발해 있었지만, 빛나는 하얀 꽃은 한 송이도 찾을 수 없었다. 아로는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내가 헛것을 본 것일까?’
아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밤, 아로는 또다시 산책을 나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빛나는 하얀 꽃이 전날 밤과 꼭 같이 눈물을 흘리며 피어있었다. 아로는 조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거기 있었구나.”
눈물의 꽃은 대답인 양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며 고요히 빛을 내뿜었다. 아로는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꽃송이를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밤이슬이 내리는 것도, 먼동이 터오는 것도 모르고 곤히 잠을 잤다.
잠결에 아로는 너무나 밝은 무언가가 다가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금빛에 싸인 월백이 달못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로는 너무나 눈이 부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월백은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아로는 잠시 넋이 나가 찰랑이는 물이 된 월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생 처음 달에게 꽃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로운 꽃이 생각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로는 얼른 고개를 돌려 꽃을 찾았다. 꽃은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꽃은 녹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물이 되어 조금씩 녹아가던 꽃은, 동쪽 산 위로 해가 떠오를 때쯤 완전히 녹아 달못 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낮에는 꽃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구나.’
아로는 놀라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되자, 아로는 또다시 눈물의 꽃을 만나러 갔다. 아로는 눈물의 꽃이 달못 물과 달빛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늘 밤은 눈물의 꽃이 녹기 전에 꺾어 보기로 하였다.
눈물의 꽃은 어김없이 달못 가장자리에 흩어져 피어 있었다. 아로는 손을 내밀어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꺾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솥에다 꽃을 넣고, 달못에서 길어 온 물을 부은 후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물이 끓은 후 솥뚜껑을 열어보니, 꽃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반짝반짝 빛나는 물이 남아있었다.
아로는 그 물을 마셔보았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달못에 온 이후, 죄책감과 괴로움 때문에 아로의 심신은 줄곧 천근이나 된 듯 무거웠고, 약해진 위장은 신선과 말고는 아무 것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물을 마시고 나니, 몸에는 힘이 솟고 마음의 아픔은 사라졌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도 없어졌다.
그날 이후, 매일 눈물의 꽃을 달여 마신 덕분에 아로는 늘 기운이 나고 기분도 상쾌했다. 아로는 그 꽃에 달모시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