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일이 아니냐? 그 집은 불에 타버리고 집터는 수풀로 덮여 있었는데, 다시 집이 생기고 여인이 산다니?”
죽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죽현의 맞은편에는 양질과 양적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일갈찬의 품계를 받고 어엿한 관리가 되어 죽현을 보필하고 있었다. 지금 세 사람은 죽현의 방에서 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집 마당에는 보랏빛 잎과 흰색 과일이 열린 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미설께서 사실 때와 똑같습니다.”
양질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약을 달일 때 쓰는 약초의 이름이 ‘달모시꽃’이라고 하니,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양적도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 여인이 미설일 리도 없고…….”
죽현은 어찌된 일인지 알기 전까지는 도무지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저희들이 한 번 다녀올까요?”
양질의 말에 죽현의 얼굴은 기다렸다는 듯 밝아졌다.
“오, 그게 좋겠구나. 가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그리하여 양질과 양적은 곧장 부리산으로 향했다. 달못에 이르니, 반대편 숲길 근처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로를 보았다. 머리는 희끗해졌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주름져 있었다. 진한 최고의 옷만 입던 몸에는 여기저기 기운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비단 신을 신던 발에는 해진 짚신이 신겨있었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옛날의 도도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입가에는 여염집 아낙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 여인이 아로 이사금이었던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양질과 양적은 준비해 온 조그만 항아리를 들고 줄을 섰다.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양질이 조그만 목소리로 산할머니에게 말했다.
“저희는 일갈찬 양질과 일갈찬 양적이라 합니다. 미추 이사금께 가지고 갈 약을 나누어 주시겠는지요?”
아로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곤 약을 떠서 항아리에 부어주었다. 약을 받은 양질과 양적이 비켜나려고 하자, 산할머니는 여느 백성들에게 할 때와 다름없이 따뜻한 미소를 띤 채 말하였다.
“조심해서 돌아들 가시구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달못이 붐볐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왔고,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산할머니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의아하게 여겼는데,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약으로 가득 찬 항아리 두 개 중 하나가 다 비워질 즈음, 백성들이 누군가에게 길을 터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사금께서 도착하셨다는군.”
“어디, 나도 좀 가까이에서 보세.”
“과연 우리 이사금님은 하늘의 자손이 맞구먼. 저 인자하신 얼굴을 좀 봐.”
백성들은 왕의 행차를 보려고 앞 다투어 고개를 내밀었다. 백성들이 터주는 길이 점점 넓어졌다. 곧 그 길은 산할머니의 항아리 앞까지 이어졌다.
잠시 후, 백성들 틈에서 흰 옷을 입은 백발의 죽현이 나타났다. 양질과 양적은 식솔들까지 거느리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죽현은 양질과 양적의 어린 손자손녀들을 먼저 산할머니에게 보냈다. 아이들의 항아리가 채워지자, 그 다음은 양질과 양적의 자식들이 약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양질과 양적까지 약을 받고 물러나자, 마침내 백발의 죽현이 산할머니를 마주하고 섰다.
죽현은 조그마한 항아리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산할머니는 죽현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죽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산할머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산할머니도 죽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현은 조심스럽게 항아리를 품에서 꺼냈다. 너무 늦게 찾아온 미안함과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버린 아로의 모습에 죽현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항아리를 내밀었다. 산할머니는 작은 표주박 바가지를 달모시꽃물 속에 담갔다. 그 물은 빛이 들지 않아도 절로 반짝였다. 산할머니는 바가지 가득 약을 떠서 죽현의 항아리에 조심조심 부어넣었다. 약을 받은 죽현이 산할머니에게 물었다.
“생활은 고단하지 않으시오?”
그러자 산할머니가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저에겐 과분할 따름이옵니다.”
산할머니를 바라보는 죽현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강산이 몰라보게 아름다워졌사옵니다. 모두 이사금님의 덕이시옵니다.”
산할머니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그리곤 다시 줄을 선 백성들에게 약을 부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죽현은 항아리를 시종에게 맡기고 달못에 다가가 절을 올렸다. 그리곤 산할머니를 다시 돌아보았다. 백발이 되어가는 흰 머리와 낡았지만 깨끗한 옷, 눈물이 씻어낸 듯 맑고 자애로운 얼굴, 백성들에게 내미는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손길……. 죽현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그대의 모습에서 달모시꽃을 본다오.’
아이들은 제 부모들의 손을 놓고 여염집 아이들과 어울려 달못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양질의 손자 하나가 제 어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어머니, 달모시꽃은 어디에 있어요?”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다.
“달모시꽃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맑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단다. 마음이 그렇게 돼야만 그 꽃을 볼 수 있어.”
“산할머니처럼요?”
아이의 물음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것을 지켜보던 죽현이 아이를 불렀다.
“이리 온.”
아이는 죽현에게 뛰어가 손을 잡았다. 죽현은 몸을 낮추어 앉았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달못 가장자리를 따라 크게 원을 그리며 말했다.
“아주 깊은 밤, 달모시꽃은 이곳을 가득 메울 정도로 피어난단다. 달모시꽃은 백성을 위한 눈물과 달빛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되어야만 그 꽃을 볼 수 있다는구나. 말해 보렴. 너도 그 꽃을 볼 수 있겠니?”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현은 밤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날 달모시꽃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하늘에는 달모시의 넋이 깃든 아름다운 달이 떠 있고, 달못에는 눈부신 물결이 일렁인다. 하얗게 빛나는 달모시꽃은 보석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달못가를 가득 메웠고, 산할머니는 한 송이 한 송이 정성스레 꺾어 바구니에 담고 있다.
죽현은 산할머니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줄은 줄어들지 않았고, 산할머니는 약을 부어 주느라 쉴 틈이 없었다.
죽현은 산할머니와 백성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일행은 왕의 뜻에 따라 백성들이 있는 곳을 지나지 않고 숲길로 들어섰다. 얼마간 걸어가니, 산할머니의 집으로 이어지는 칡넝쿨이 보였다. 죽현과 양질, 양적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칡넝쿨을 바라보았다. 미설과 달모시가 살던 옛날의 일이 세 사람의 머릿속을 꿈결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죽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참으로 꿈인 것만 같구나.”
죽현의 말에 양질과 양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금 일행은 숲길을 따라 부리산의 울창함 속으로 사라졌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소나무들과 갖가지 종류의 참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잿빛 토끼와 노루, 다람쥐가 뛰어나와 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한들거리며 웃었다. 산할머니의 꾀꼬리가 이사금 일행을 따라가며 고운 노래로 배웅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