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산할머니의 기도

by 분촌

산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산할머니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은 여왕’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옛날 아주 먼 나라에. 한 공주가 태어났단다. 달님은 그 아이에게 특별한 눈을 주셨지. 세상을 밝게 비추는 눈이었단다. 그 눈으로 세상을 잘 살펴 어진 왕녀가 되라고 말이야.

백성들은 공주에 대한 기대가 컸단다. 공주는 자라서 왕위를 이어받았어. 하지만 여왕이 되자, 왕위를 잃을까 두려워 그만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단다. 마음의 병 때문에 여왕의 눈은 빛을 잃었지. 세상을 잘 살피지도, 어진 여왕이 되지도 못했어. 여왕은 백성들을 속이고 나쁜 일을 꾸몄어. 백성들은 살기가 몹시 힘들어졌지. 그러자 여왕은 백성들의 고통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아버렸단다.

세월이 흘러 백성들은 여왕의 잘못을 알게 되었지. 백성들은 여왕을 미워했고, 새 왕을 원했단다. 여왕은 화가 난 백성들에게서 멀리멀리 도망쳤어. 아주 먼 곳, 높은 산봉우리까지 도망쳤지.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 오직 환하게 빛나는 달님뿐이었단다.

여왕은 자신이 한 일들이 부끄러워 달님을 바라볼 수 없었어. 그래서 달님이 자신을 보지 못하게 숨어버렸단다. 하지만 달빛은 여왕의 병든 마음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빛이 들지 않는 땅속처럼 어둡고 아팠던 여왕의 마음이, 마침내 낫기 시작했단다.

어느 날, 여왕은 달님 앞에 섰어. 밝은 눈을 되찾고서 말이야. 아니, 이전보다 더 맑고 따스한 눈이었지. 여왕은 백성들 곁으로 돌아갔단다. 그리고 스스로를 벌주기 시작했어. 여왕의 벌은 오직 백성들만을 위해 살고, 백성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단다. 영원히 말이야.


“벌이면…… 무섭고 힘든 거잖아요?”

아이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러면 산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주었다.

“여왕은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 형벌이 힘들지 않았단다. 오히려 행복했단다.”

아이들은 또다시 궁금했다.

“하지만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는데…….”

그러면 산할머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몸은 죽겠지만 마음은 영원히 사는 거란다. 그 옛날 달모시의 마음도 달님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니?”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왕님도 달님 속으로 가면 되겠네요?”

아이들의 물음에 산할머니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여왕은 달님에게 가지 않기로 했단다. 천 년이 천 번 흐를 때까지 백성들 곁에서 벌을 받기로 결심했거든.”

“천 년이 천 번이나 흐를 동안요?”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치곤 했다.

“응. 천 년이 천 번이나 흐를 동안이란다.”

산할머니는 따뜻하게 웃었다.

산할머니는 어느 새 궁궐을 잊어버렸다. 자신이 이사금이었던 시절은 꿈인 것만 같았다. 오직 백성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산할머니는 매일 밤 달을 향해 기도했다. 천 년이 천 번을 거듭하는 동안 백성들 곁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산할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 숫자는 해마다 늘어났다. 20년 전, 30년 전, 40년 전……. 그 사이 죽현은 세상을 떠났고, 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산할머니는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달못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산할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산할머니가 사라진 달못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곳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올 때까지는. 그것은 윤기 나는 까만 털을 가진 어린 반달곰이었다. 반달곰은 사람을 겁내거나 해치지 않았고, 순한 강아지처럼 굴었다. 아이들에게는 재롱을 떨기도 했다.

아이들은 반달곰이 산할머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이들이 반달곰을 ‘산할머니’라고 부르자, 어른들은 아이들이 엉뚱하다고 웃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큰 소리로 산할머니를 외치면 어김없이 반달곰이 나타났으므로, 차츰 어른들도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엔 산할머니가 신선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선이 된 후엔 사람의 모습이 아닌 반달곰으로 변신해 찾아온다는 이야기였다. 진한의 모든 백성들은 반달곰을‘산할머니’라 부르며 소중히 여기고 돌보아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반달곰이 혼자 남으면, 달못가에는 하얗게 빛나는 달모시꽃이 피었다. 꽃이 피는 동안 반달곰은 고개를 들어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어느 덧 눈물을 흘리는 하얀 꽃들이 달못가를 가득 메우면, 반달곰은 아름답고도 쓸쓸한 물가를 홀로 거닐며 오물오물 꽃잎을 뜯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