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부스러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스러기 Feb 17. 2020

별 기대없이 만나보았다

크리스마스였다. 어제 김사월 콘서트를 다녀온 영미에게 카톡이 왔다. 1집에 수록된 존이라는 곡의 링크를 보내주면서 이 노래가 좋았다고 가사를 들어보라고 했다. 자신에게 감정을 주지 않았던 남자에게 담담하고 차갑게 이별을 고하는 노래였다. 타이밍이 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들었다. 나는 오늘 엄마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크리스마스에 엄마를 찾아가 효도를 한다고 지적했다. 연애를 안 해야 엄마가 효도를 받는다고. 구구절절 짜증나는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넙죽 받았다. 맞다. 누군가가 있었음에도 그를 누르고 엄마가 플랜A가 된 적이 있었던가. 미친 거지, 미쳤어.

오후 늦게까지 본가에 늘어져 있다가 꽁꽁 언 냉동반찬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다니엘이라는 애를 만나기로 해버렸다. 몇 주 전, 이태원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나서 카톡을 교환했던 외국인 유학생이었는데 외로웠는지 연말 즈음부터 연락이 왔었다. 어제부터는 좀 공격적으로 한 번 보자, 만나자 말을 하길래 귀찮음과 호기심 사이에서 어쩔까 싶다가 그냥 궁금한 마음에 짧게 만나기로 했다. 오후 8시 15분, 서울스퀘어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 도착했을 때, 그 애는 이미 한참 전 도착해 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 클럽에서 보았을 때보다 체구가 좀 더 왜소해보였고 얼굴은 좀 더 푸석해보였다. 취해서 귀여워 보였겠지. 나라고 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듣자하니 학기가 끝나고 어찌나 열심히 놀고 다니는지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나눴던 대화도 자기가 친구들이랑 뭐하고 놀았는지 뭐 그런 얘기였다. 소주를 병째로 원샷했다거나 야외에서 했던(?) 경험 같은 걸 말해주는데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애 같아 보였다. 연말을 맞아 예쁘게 불을 밝힌 서울로를 걸으면서는 그 애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결론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풀렸으며, 지금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들과 친척들이 2월에 열리는 졸업식에 모두 한국으로 놀러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좋아보였다.

별 기대없이 만난 자리였고, 기대가 없었던 만큼 특별히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더 지체하지 말고 헤어져야 될 것 같아 적당히 일어서기로 했다.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그 애는 화장실이 너무 급하다며 갑자기 도망치듯 내려버렸다. 그걸 보니 혹시 얘도 내가 별로였나 싶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카톡이 와 있었다. 사실 키스를 하고 싶었다, 너가 너무 귀여웠다, 이런 말을 그 애는 수줍게 보내왔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괜히 시간낭비 하지 않도록. 이전에 내가 솔직함을 유예하여 더 상처를 주었던 이들을 생각하며. 너에게 끌리지 않았다고, 미안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호감을 표현하는 상대방을 거절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살면서 별로 할 일이 없어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누군가의 바람을 꺾는 행동 자체에서 근원적인 죄책감이 느껴졌다. P도 그랬을까.


두 달 전까지 짧은 만남을 이어온 P는 끝내 내게 정리하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나는 자주 ‘관계의 불균형’에 대해 생각했고 그의 감정이 나의 그것보다 덜 깊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하지만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시들어가는 관계의 민낯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였다. 몸이 피곤해 만나러 나오지 못하겠다고 했을 땐 내가 그를 찾아갔다. 일이 바빠서 못 만나겠다고 했을 땐 잠자코 기다렸다.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의 잘못이 아니니까. 아쉽지만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상황만의 문제가 아님은 그리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앎이란 어떤 사건이나 계기를 통해 얻어지기보다는 암실 속 사진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또렷해지는 방식으로 찾아왔다. 의심과 희망과 확신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얕고 잔잔한 고통이 꽤 길게 지속됐다.


결국 이 관계가 잘 안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가 나서서) 내리기까지 나는 P를 쉽게 정리하지 못했다. 그건 상당 부분 그의 비겁함과 이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고, 나도 충분히 사랑을 돌려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잊었다. 그것이 얼마나 성숙하지 못한 행동인지, 또 그런 행동의 결과인지를 꽤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사실 크리스마스고 연말이고 다 떠나서 내게 필요한 건 결국 one and only인 어떤 사람일 뿐인데. 그게 참 왜 이렇게 쉽지 않은지 모르겠다고.

그러다가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느닷없이 동료 D에게 받은 연락이 생각났다. ‘모하냐’는 메시지였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그녀는 오타가 잔뜩 섞인 문자로 지금 많이 취했다고 했다. 만날 수 없는 상황임을 알자 미안하다고, 자기는 단지 지금 사귀는 사람과 도저히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술을 빨리 마셔버리고 집에 가는 택시 안이라고, 그에게 더 이상 감정이 없어서 사실 다른 사람과 여러 번 만났었다고, 자기는 ‘졸라미친쓰레기’라고 근데 새로 만난 사람이 더 좋다고, 이런 내게 괜찮다고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 암호 같은 문자들을 미안하다 고맙다 하는 흩어지는 말 속에서 어렵사리 읽는 동안 어쩐지 이 상황이 안타까웠고 슬퍼졌다.

단 한 사람을 찾고 싶어서 우리는 타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신중해지기도 잔인해지기도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괴로울 때, 누군가는 감정이 따르지 않아 고달파한다. 하지만 그 둘이 정말 다른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건 하나의 욕심,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의 문제가 아닌가.


- 2018년 12월 25일

매거진의 이전글 폭염과 꽃게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